《“(만주어인)바이타 워심부러…. 한문으로는 주사(奏事)라고 써놨는데 이걸 ‘모여서 일하는’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직책으로 봐야 할까요?” “문맥상으로는 직책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11일 오후 7시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309호 강의실. 만주어 강사 이선애 씨(35·여)가 꼬불꼬불하고 길쭉한 만주문자에 대해 수강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날 공부한 내용은 청나라 강희제가 몽골의 부족인 준갈(準갈)을 정벌하러 갔을 때의 기록이다. 대만 학자가 청 실록과 관리 보고서를 발췌해 엮은 ‘청대준갈이사료(淸代準갈爾史料)’에 있는 기록이다.》 淸 300년간 중국의 공식언어… 조선 등 관계연구에 활용
해독 못한 史料 100만건 “한국이 연구 구심점 되게 노력”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만주어강좌가 6월로 개설 1년을 맞는다. 초급과 중급코스, 본격적으로 사료를 읽는 만문사료강독 코스가 있다. 지금까지 70여 명이 수강했고 현재 초급, 강독 코스에서 각각 7명, 6명이 공부하고 있다. 수강생은 역사를 전공하는 석박사 과정 연구자들과 역사에 관심 있는 주부 회사원 등이다. 현재 만주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민족문화연구원과 서울대 언어학과 정도다.
만주문자는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1599년 만들었다. 이 문자는 누르하치가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300여 년간 한자와 함께 공식 문자였다.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패한 1639년 청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만주문자가 새겨져 있고 투전(鬪전)에 그려 넣기도 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만주족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한족(漢族)에 동화됐기 때문에 만문사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울대 언어학과에서도 전공과목을 개설했지만 만주문자를 활용해 역사를 연구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민족문화연구원이 지난해 만주어 강좌를 개설한 것은 청나라의 역사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만주문자 사료를 읽어야 하기 때문. 최근 2∼3년 국내 학계에서 만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도 만주어 강좌 개설의 배경이 됐다. ‘만주족의 청제국’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러시아인이 바라본 1898년의 한국·만주·랴오둥반도’ 등의 책이 번역돼 나왔고 민족문화연구원은 한국학도서관에 만주학 관련 도서 2000여 권을 구비하기도 했다.
역사학계는 이런 성과들이 청나라를 둘러싼 한국 일본 등 동북아의 정세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설 때부터 이 강좌를 들어온 안대옥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49·중국근세사)는 “서양과학이 동양에 미친 영향을 공부하고 있는데 강희제 때 만주문자로 번역된 서양과학서 등을 직접 해독할 수 있게 돼 연구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만주문자 사료는 강희제가 몽골 정벌 중에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처럼 청나라 황실의 비공식적인 일상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만주어 강사 이훈 씨(43)는 “중국 베이징의 역사문서보관소에는 해독하지 못한 만주문자 사료가 100만 건에 이른다”며 “이 같은 자료를 활용하면 청나라 역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역사 연구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만주어 강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자 민족문화연구원은 만주어를 배울 수 있는 한국어 교재와 사전, 어휘집을 만들 계획이다. 김흥규 민족문화연구원장(국문학)은 “세계적으로 만주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만주어를 읽을 수 있는 인력은 절대 부족하다”며 “한국이 만주어 연구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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