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노년세대의 은퇴이민이나 젊은 세대의 은둔형외톨이 현상을 모두 일본사회에 대한 집단 거부심리의 일환으로 풀어낸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일본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연극은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한국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의 연극은 붉은 노을처럼 불콰하게 정념을 물들인다.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인인인’ 시리즈의 두 번째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히라타 씨가 2008년 발표한 희곡을 박 씨가 한국어 연극으로 풀어냈다.
연극은 말레이시아 일본인 은퇴이민촌을 무대로 무기력증에 빠진 일본 사회를 일종의 심리적 망원경으로 포착했다. 암에 걸렸지만 일본 귀국을 거부하는 켄이치 부부(정재진, 예수정), 2차대전 때 말레이시아 전선에서 잃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흘러온 아키라(최용민), 학창시절 이지메의 상처를 잊고자 남편을 따라 일본을 떠나온 중년의 치즈코(서이숙),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로 살다 건너온 젊은 하라구치(박완규)….
쾌적하고 풍족하고 친절한 은퇴이민촌의 삶은 꿈처럼 달콤하게 다가선다. 은퇴이민지를 물색하러 단기 방문한 나오에 부부(김도균, 정희정)는 그 부푼 꿈의 대리자다. 하지만 곧 뿌리 뽑힌 그들 삶의 공허함이 드러난다. 몸은 말레이시아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일본을 배회한다.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그리워하고, 녹화한 일본 TV드라마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런 ‘유령의 삶’은 이민촌의 잔심부름을 하며 살아가는 젊은 하라구치와 대비를 통해 뚜렷해진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로 살 수밖에 없는 하라구치나 암에 걸려서도 두 딸이 사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켄이치나 결국 일본 고도성장신화가 초래한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트라우마)의 희생자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면서도 본국으로 못 돌아가는 치즈코와 죽고 죽이는 꿈밖에 못 꾸는 하라구치가 풍선껌을 나눠 씹으며 동병상련을 나누는 장면이 이를 상징한다. 켄이치의 아내 이쿠코가 꿈을 통제한다는 말레이시아 원주민 세이노족에게 들은 꿈풀이, “당신이 당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는 이들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역설적 이유를 설명해준다.
히라타 씨의 대본은 이를 잔잔한 호숫가의 풍경처럼 그려냈다. 박근형의 연출은 그 호수에 돌을 던지는 에너지를 잔뜩 응축한 채 이를 풀어낸다. 뜨거운 분화구를 감춘 차가운 화산호의 정경이다. 6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02-708-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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