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성(1901∼?)이 그린 ‘격구도’. 격구를 좋아한 정종은 재위 2년 2개월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지인들을 불러 매일 격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학근 순천향대 초빙교수는 “정종은 격구 덕분인지 63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고 설명했다. 그림 제공 플래닛미디어
《조선의 제7대 왕 세조에 대한 평가는 곱지 못하다.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세조는 ‘비정한’ 왕이다. 하지만 ‘세조실록’에 나타난 세조의 모습에서 뜻밖의 면모가 드러난다.》
꽃밭 가꾸는 태조… 격구에 미친 정종…
‘왕조실록’에 기록됐으나 알려지지 않은 史實소개 광해군 때 UFO 묘사 등 과학적 얘깃거리도 흥미
주로 무인과 어울려 지내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 세종이 가야금 타는 모습을 보고는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악기 연주에 소질을 발견한 그는 가야금 피리 비파까지 연주했다. 왕위에 오른 뒤 세조는 대신들에게도 음악 공부를 권장했다.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여야 할 시기에 쓸모없는 음악을 권장하느냐”는 대신들의 반발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음악은 고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고, 약하지만 강폭한 사람의 마음을 제압할 수 있다. 음악의 오묘한 소리 한가운데 진리의 정수인 도가 함축돼 있다. 이것이 음악을 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몰랐던 조선’을 쓴 장학근 순천향대 초빙교수(이순신연구소장)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으나 정사(正史)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史實)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꽃을 사랑한 왕이었다. 그가 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은 뒤 국호 개정과 수도 이전 문제로 고민할 때였다. 환관 김사행의 권유로 궁궐 밖 팔각정에 나들이를 한 그는 두메양귀비, 풍선난초, 구름꽃다리 등 각양각색의 꽃에 매료됐다.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화원을 가꾸는 데 열중하느라 국사(國事)를 소홀히 하기도 했다.
정종은 격구에 빠져 살았다. 격구는 말을 타고 긴 장대로 공을 쳐 상대편 문에 넣는 경기로 고려 때 시작됐다. 격구를 하느라 경연(經筵)에도 빠지자 신하들이 이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정종은 “과인에게는 수족이 저리고 아픈 지병이 있다. 경연 시간에 격구를 해 몸에 기운을 통하도록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사냥 마니아였던 태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를 날려 꿩과 토끼를 잡았다. 사냥 때문에 쉬어야 할 군사들이 사냥꾼으로 재소집되거나, 사냥하는 왕에게 올릴 음식과 다과를 마련하기 위해 수령들이 백성의 물품을 징수하는 폐단이 생겼다. 신하들이 자제를 당부하자 태종은 “사냥으로 몸을 단련해야 강건하게 국정을 제대로 살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박했다.
조선왕조실록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연산군은 ‘연산군일기’에 110여 편의 자작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경연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글로 옮겼다. 그는 동물 수집광이기도 했다. 당나귀 말 같은 덩치 큰 동물이 수십 필이나 됐고, 여우 10여 마리를 궁궐에 들였으며 팔도에서 진상 받은 개를 궁궐에 풀어놓기도 했다.
‘UFO가 날고 트랜스젠더 닭이 울었사옵니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낸 과학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예종 1년인 1469년, 궁궐 후원에 흰색 털을 가진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예종은 “요사이 흰 까마귀가 후원에 날아오니 이는 나의 과덕한 소치이므로 깊이 스스로를 꾸짖는다”는 전교를 승정원에 내렸다. 그러나 신하들은 ‘정성이 종묘에 감동되면 흰 까마귀가 이른다’는 중국 고사를 언급하며 상서로운 징조라는 해석을 내렸다.
미확인비행물체(UFO)로 여겨지는 괴물체의 출현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 9월 25일의 ‘광해군일기’에는 한 달 전 원주 강릉 춘천 등 강원도 일대에서 목격된 괴물체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강릉부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과학 전문 작가인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어떻게 이런 것까지 적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기록이 많다. 기록의 세세함과 일상성이 ‘조선왕조실록’이 가진 위대한 점으로, 오늘날 과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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