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票는 이미지서 나온다”선거판 주무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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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5일 03시 00분


◇알파독/제임스 하딩 지음·이순희 옮김/351쪽·1만6000원·부키

1986년 3월, 미국의 정치 컨설팅 업체 소여밀러그룹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우리나라에도 코라손 아키노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1986년 필리핀 대선에서 소여밀러의 도움으로 아키노가 독재자 마르코스를 물리친 뒤였다.

당시 소여밀러에서 일하고 있던 데이비드 모리는 이후 10여 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컨설팅을 담당했다. 모리가 제안한 선거 전략은 김 전 대통령의 사명감과 목적의식을 강조하고 정당보다는 개인을 부각하라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적극 채택하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모리는 은퇴 선언을 오히려 기회로 봤다. 김대중재단 설립을 돕고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대대적인 로비를 펼쳤다.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승리했다.

알파독은 망보는 개 무리에서 상황을 통제하고 지시를 내리는 개를 뜻한다. 저자는 선거 전략을 수립하는 정치 컨설턴트들을 알파독에 비유했다. 소여밀러는 알파독 중의 알파독. 1970년대 초 설립된 뒤 이들은 미국은 물론 필리핀, 한국, 베네수엘라, 칠레 등의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현대 정치에서 언론에 등장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 1986년 필리핀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던 마르코스는 독재자에다 부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경쟁자였던 아키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내가 무얼 알겠어요”라며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선거 10주 전까지만 해도 아키노의 무능함은 마르코스의 독재보다 더 큰 결점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소여밀러의 컨설턴트들이 투입됐다. 아키노의 화법은 완전히 바뀌었다. 대통령으로 복무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점을 부각하고 연설 실력을 갈고닦았다.

마르코스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도 사용됐다. 마침 그의 무공훈장이 조작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를 뉴욕타임스가 보도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입수한 소여밀러 측은 선수를 쳤다. 보도 전날 아키노가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감하다면 피하지 말고 나와 토론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한 것이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마르코스가 그리 용감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줬다.

소여밀러는 독재국가의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정치에서 유권자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정책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경쟁자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는 네거티브 전략이 정치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싫증을 내도록 했다는 것.

이제 선거 전략의 중심은 인터넷으로 옮아가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 데이터를 분석해 유권자 성향을 파악하거나 유권자층을 세분해 각각 다른 전략을 적용하는 식이다. 전략 수립에 필요한 돈은 점점 많아지고, 정치 컨설턴트의 영향력도 더욱 커졌다. 소여밀러에서 일했던 해리스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예전에는 정당 당수들이 정치를 독점했습니다. 지금은 직업적인 정치 계층이 정치를 과점하고 있습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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