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면 황량할 뿐이죠. 법당과 비각, 부도(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 정도만 남았으니까요. 그러나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라는 실마리를 붙잡고 들어가 보면 고려시대 크고 웅장했던 절의 모습을, 효성이 지극했던 일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종문 계명대 한문학과 교수가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글항아리)을 펴냈다. 다양한 한문 기록을 담은 ‘인각사 관련 자료 집성’과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초서체 두루마리 인각사적(麟角事績) 영인본을 책 말미에 첨부한, 예사롭지 않은 답사기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에 자리한 인각사(麟角寺). ‘기린(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의 뿔’이라는 절 이름은 인근 산등성이 모양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이 교수는 추측한다. 고려 충렬왕의 국사(國師)였던 일연(1206∼1289)이 말년에 5년 동안 머무르며 삼국유사를 마무리한 곳으로 알려졌지만 오늘날 초라한 모습만큼이나 그 역사에 대해서도 가려진 부분이 많다. 저자는 이미 알려진 한문 자료와 발굴 문화재 등에 직접 발굴한 자료를 직조해 인각사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설이 있는 인각사는 조선시대에는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이 교수는 임진왜란 때의 피란 일기인 암곡 도세순(都世純·1574∼1653)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서 인각사 묘사 부분을 찾아 임란 전에는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음을 밝혔다. 일연의 생애를 전하는 단서인 인각사 비의 본래 위치가 극락전 앞이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인각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 지역 유림들은 그 자리에 서원과 사찰을 세우는 문제로 논쟁을 펼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인각사가 있던 자리에까지 서원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사라질 위기를 모면했다. ‘인각사적’은 당시 논쟁 과정을 적은 자료다. 따로 탈초(초서를 정자로 다시 기입)해 책에 덧붙였다.
일연의 부도는 원래 인각사에서 1.1km가량 떨어진 둥둥이마을의 산기슭에 있었다. 일연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첩첩산중의 인각사까지 왔고,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묘지가 잘 보이는 반대편 등성이에 자신의 부도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일연의 부도가 인각사 경내에 들어와 있다. 이 교수는 부도 이전에 직접 참여한 마을 노인을 찾아 1963년에 부도를 옮겼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 교수는 이 밖에도 인각사지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인각사 비는 명필가인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는데 조선시대 탁본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비석을 일부러 깨뜨리기도 했죠. 당초 부도가 있던 자리를 명당으로 여긴 유림들이 몇 차례나 부도를 밀어내고 묘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의 인각사 전경. 이 사찰은 고려 충렬왕의 국사였던 일연(작은 사진)이 말년에 5년 동안 머무르며 ‘삼국유사’의 집필을 마무리한 곳이다. 사진 제공 글항아리한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았던 이 교수는 대학생 때인 1975년에 인각사를 보고 받은 충격으로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민족의 역사서 삼국유사가 나온 곳이지만 당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들이 다 스러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사무치게 느끼려고 가고 또 가는’ 바람에 지난 10여 년간 인각사를 100차례 이상 다녀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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