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 ‘편지 속 일상어’ 살아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7일 03시 00분


‘간찰 낱말 사전’ 편찬하는
가회고문서연구소

“대부분 날씨 등 생활관련어
漢韓사전에 없는 단어 많아”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고문서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조선시대 편지(간찰)를 보며 ‘간찰 낱말 사전’에 수록할 어휘들을 엄선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송희 씨, 박형우 씨, 이대형 동국대 교수, 하영휘 소장, 윤성훈 씨, 전송열 교사. 김재명 기자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고문서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조선시대 편지(간찰)를 보며 ‘간찰 낱말 사전’에 수록할 어휘들을 엄선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송희 씨, 박형우 씨, 이대형 동국대 교수, 하영휘 소장, 윤성훈 씨, 전송열 교사. 김재명 기자
“추사의 편지에 나오는 ‘즉병(卽丙)’에서 ‘즉’자는 빼고 표제어로 올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병’의 의미를 ‘불태운다’로 해두면 ‘즉병’의 의미는 ‘편지를 받아 보고 즉시 태우라’로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가회고문서연구소. 한문 서적이 빼곡히 꽂힌 연구소에서 일곱 명이 옛 편지에 나오는 한자어의 뜻을 풀이하고 있었다. 사전에 들어갈 단어를 엄선하는 과정이었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사전은 국내 첫 ‘옛 편지(간찰) 낱말 사전’. 2004년 편찬 작업을 시작해 올 10월까지 8000여 개 표제어 선정을 끝낸 뒤 연말에 사전으로 편찬할 계획이다.

“편지글에는 생활과 밀착된 의식주, 농사, 날씨, 질환, 약, 교통 등에 관한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관에서 만든 공식 사료나 후손들의 편집 과정을 거쳐 발간되는 문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지요. 양반들이 관직을 부탁하거나 집 토지를 매매할 때 쓰는 특별한 말도 있습니다.”(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

사전 편찬 작업은 1998년 간찰 강연를 듣던 한 수강생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하 소장과 제자 지인들이 뜻을 모은 뒤 준비작업을 거쳐 2004년 편찬 작업에 들어갔고 2007년부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이 재료로 삼는 간찰은 추사 김정희의 선조로 영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경이 아들에게 쓴 편지 등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주고받은 것들이다.

현재 임재완 전 수원박물관 전문위원(한문학), 전송열 서울 마포 성서중 교사(한문학), 이대형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고전문학), 서울대 대학원생인 윤성훈 씨(미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생 제송희 씨(미술사), 박형우 씨(고문서학)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간찰에서 새 단어를 찾아내 온라인 사이트에 올린 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의견을 교환한다.

한문은 관련 고사가 많아 해석이 어렵다. 특히 초서로 쓴 편지글이 많아 읽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어휘를 ‘근묵’ ‘한국간찰자료 선집’ ‘정조임금편지’ 등 55권의 간찰집과 비교한 뒤 간찰집에 실린 예문을 사전에 함께 싣는다.

편지글엔 공식적인 문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상적인 어휘가 많이 담겨 있다. 최근 역사나 문학 연구에 일상의 구체적 행적을 들여다보는 생활사 연구가 늘어나면서 간찰 낱말 사전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전송열 씨는 “현재 한국에서 한문 해석에 활용하는 사전은 일본에서 나온 ‘대한화사전’, 중국에서 발행된 ‘한어대사전’, 단국대에서 만든 ‘한국한자어사전’이 있다”며 “외국의 용례나 제도적 용어에 치우친 기존 사전과 차별화된 사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교침(喬沈)’은 ‘편지가 중간에 분실됐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그런 사고가 많아 자주 쓰는 말이었지만 기존의 어느 한문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중국 고전인 ‘세설신어(世說新語)’에 한 관리가 전달을 부탁 받은 편지를 모두 강물에 버린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에는 격식을 갖추는 의례적인 말로 쓰였지만 지금은 뜻조차 짐작하기 힘든 단어도 많다. ‘전시(篆侍)’는 지방관으로 나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쓰는 말로, ‘전시 평안하신가’와 같이 편지 첫머리에 자주 쓰였다. ‘누만(漏萬)’은 편지 끝에 쓰는 상투적 용어로, 할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쓰고 줄인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대형 교수는 “조선시대 편지는 따지고 보면 남자와 남자가 주고받은 것인데도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나 안부를 걱정하는 모습이 연애편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절절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윤성훈 씨는 “편지글에 질환이 자주 등장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모호한 행적이 많았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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