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웃다가 묻는다, 예술은 정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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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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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광부화가들’
대본 ★★★★ 연출 ★★★★ 연기 ★★★☆

1930년대 英탄광지대 화가들
‘애싱턴 그룹’ 실화 소재
예술의 의미 깨닫는 과정 그려


미술 문외한인 광부들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예술의 본질을 깨달아간 실화를 극화한 연극 ‘광부화가들’. 미술감상 교육의 일환으로 광부들에게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한 라이언(권해효·오른쪽)은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의 모습을 포착한 그림의 높은 수준에 깜짝 놀란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미술 문외한인 광부들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예술의 본질을 깨달아간 실화를 극화한 연극 ‘광부화가들’. 미술감상 교육의 일환으로 광부들에게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한 라이언(권해효·오른쪽)은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의 모습을 포착한 그림의 높은 수준에 깜짝 놀란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빌리 엘리어트’의 극작가 리 홀의 작품 속에서 예술은 두 종류다. 하나는 지식과 정보로서의 예술, 또 하나는 재능과 삶으로서의 예술이다. 전자가 머리로 이해하는 예술이라면 후자는 몸으로 터득하는 예술이다.

리 홀은 후자를 옹호한다. 1980년대 영국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권투를 배우다 발레에 눈을 뜬 빌리가 로열발레스쿨 면접시험에서 발레를 출 때의 느낌을 말로 표현할 길 없어 몸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이를 대표한다.

그가 이번엔 발레가 아닌 미술로 이 같은 예술 인식을 담아냈다. 1930년대 영국 동북부 탄광지대를 배경으로 평생 그림 하나 제대로 본 적 없던 아저씨들이 그림에 눈을 떠 ‘애싱턴 그룹’이란 전문적 화파로 성장한 실화를 극화한 ‘광부화가들’이다.

1막은 배꼽 빠질 정도로 웃긴다. 로열 칼리지에서 미술을 전공한 라이언(권해효)은 애싱턴 탄광노조원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러 왔다가 혼쭐난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슬라이드로 대충 보여주고 현대미술 감상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이름은커녕 그림조차 본 일 없는 문외한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그림을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해 달라. 라이언은 미술사나 미학개론 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를 떠들지만 광부들에겐 외계어가 따로 없다. 연출과 함께 번역도 맡은 이상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재기가 빛난다.

온통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광부들에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 라이언은 직접 그림 그리기를 택한다. 그런데 광부들의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화가로는 실패했지만 미술이론가로 성공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라이언은 이들 광부의 숨겨진 재능을 끌어낸다. 직접 붓을 잡은 광부들은 자신들의 삶을 화폭에 옮기면서 진정한 예술의 묘미를 터득해가기 시작한다.

2막은 예술의 본질로 파고드는 깊이가 있다. 애싱턴 그룹 중에서 예술가로서 자의식이 뚜렷해진 올리버(윤제문)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애싱턴 그룹의 첫 전시회의 모토로 라이언이 앞세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란 말에 그는 “아무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선다. 화가로서 자신이 라이언을 능가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술애호가인 부호 헬렌(문소리)이 그런 올리버에게 광부로 받는 임금을 무상으로 제공할 테니 독립된 화가의 길을 걷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예술적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이 도박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명성과 부를 획득한 뒤 예술의 여신에게 자신의 인생을 바쳤노라고 때로는 자부심 가득히, 때로는 회한에 가득 찬 시선으로 스크린 너머를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올리버는 예술보다 인생을 택한다. 광부로서 삶이 지긋지긋하더라도 자신의 예술이 바로 거기에 뿌리박고 있음을 인식하고 광부의 삶을 버리지 않는다.

연극은 이 지점에서 ‘빌리 엘리어트’와의 차별성을 획득한다. 빌리는 예술을 동아줄 삼아 탄광촌의 삶에서 탈출하지만 ‘늙은 빌리’라 할 수 있는 올리버는 예술을 삶의 동반자로 삼아 탄광촌에 남는다. 이 점에서 그는 애싱턴 그룹에 대한 논문을 지렛대 삼아 명문대 교수가 된 뒤 애싱턴 그룹을 떠난 라이언과도 대별된다.

라이언은 광부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알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실천한 쪽은 “우리는 단 한 번도 상업적인 그룹이 아니었습니다”란 말을 남긴 올리버였다.

올리버 못지않게 실존 인물을 모델로 개성 넘치는 광부화가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원창연 김승욱 이대연 씨의 연기 호흡이 일품이다. 애싱턴 그룹의 실제 그림을 비롯해 100여 편의 미술작품을 3개의 스크린을 통해 배우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5만 원. 30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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