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묵시론적 영화를 보고 난 느낌에 비길 만하다. 인간의 야만성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가감 없이 표현한 판화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온다. 모든 작품은 무방비 상태로 고통을 겪는 피해자의 시각에서 그려져 암울함은 극대화된다.
30일까지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독일 작가 오토 딕스(1891∼1969)의 판화전은 전쟁의 아픔과 상흔을 냉정하게 일깨운다. 그가 1920∼1924년 제작한 시대비판적 판화 35점, 1924년 발표한 50점의 동판화 연작 ‘전쟁’을 선보인 전시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딕스는 독일의 사회적 병폐와 구조적 모순을 극단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신(新)즉물주의 대가로 꼽힌다.
“코멘트가 불필요한 것들이 존재한다. 내게 있어 행위는 언제나 말보다 중요했다. 나는 시각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 사람이지 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들 속에서 언제나 입장 표명을 하고,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과 진실을 위해 발언되어야만 할 것들을 보여준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감정의 개입이나 미화 없이 냉정한 관찰과 정밀한 묘사를 중시했다.
미술을 공부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원입대한 딕스는 전선에서 3년을 보내면서 인간의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이때의 참혹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전쟁’ 연작은 반전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자 작가 자신의 악몽과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포탄 구멍과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 수북한 해골 더미 옆에서 싸우는 병사의 모습에서 살상지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전쟁’은 케테 콜비츠의 목판화 연작과 함께 1924년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국제반전미술관에 전시돼 전쟁을 쉽게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불행한 시절을 상기시켰다.
전쟁은 끝나도 비극은 계속된다. 팔다리가 없는 상이군인들이 거리의 성냥팔이로 전락하고 전사자 부인들은 매춘부로 내몰리지만 소시민들은 이들을 외면하고 전쟁으로 특혜를 본 사람들은 사회에서 떵떵거린다. 살인과 거짓, 부패와 타락 등 비판적 주제를 담은 딕스의 그래픽 작업은 기괴하면서도 희극적으로 1920년대 독일의 현실을 증언한다.
잔혹한 살상의 현장, 전후의 피폐한 풍경을 집요하게 파고든 딕스. “나는 내 그림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망상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은 늘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였음을 증명해준다. 02-880-9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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