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작가 고골의 단편소설
독특한 무대언어로 재구성
극 초반 강렬한 이미지
중반 이후엔 집중력 떨어져
다국적으로 구성된 배우들은 각자 모국어로 떠든다. 이탈리아어로 시작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와 브라질어까지. 자막이 없지만 의미 전달엔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희극적 신체언어가 의미를 대신 전달하기 때문이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폐막작으로 22, 23일 경기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국내 초연한 영국 극단 게코의 ‘오버코트’(연출 아밋 라하브)는 언어까지 음향화한 ‘논버벌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보였다. 배우들의 풍부한 몸짓과, 그 배우들마저 무대세트의 일부로 활용한 독특한 무대연출이 의미를 창출한다.
이 작품은 지난해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단편소설 ‘외투’를 새로운 무대언어로 재구축한 공연이다. 여기서 새로운 무대언어란 신체와 이미지, 사물 그리고 음악을 종합해 관객에게 새로운 극적 체험을 안겨주는 것을 말한다.
원작 소설 ‘외투’는 신랄하면서도 풍자적인 문체를 통해 말단공무원 아카키를 현대적 희비극의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한편으론 무미건조한 아카키의 단순한 삶을 풍자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간신히 마련한 외투를 강도당한 뒤 추위와 실의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아카키가 유령이 돼 복수에 나선다는 사회비판이 함께 담겼다.
연극은 소설에서 말을 통해 펼쳐진 희극성을 이미지와 음악으로 형상화한다. 무대는 크게 둘로 나뉜다. 아카키의 비좁은 하숙방과 번잡한 사무실이다. 하숙방의 아카키는 혼자만의 공간을 만끽하며 몽상을 하거나 자위행위를 한다. 하지만 그의 하숙방에 걸린 사진 액자는 액자 속 주인공들이 들고 있는 것이고 침대와 문 역시 배우들이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카키의 일거수일투족은 밖으로 퍼지고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아카키는 감시카메라와 도청으로 사생활마저 박탈당한 현대 소시민을 상징한다.
번잡한 사무실의 아카키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킨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관료적 공간에서 그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거나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아카키는 그렇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의 모든 샐러리맨을 표상한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현실을 비판했던 소설이 21세기 현재를 보여주는 연극으로 바뀌면서 외투의 의미도 바뀐다. 소설 속 외투는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건 최소한의 품위유지를 위해서건 아카키에겐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다. 그러나 연극에선 그가 짝사랑하는 나탈리라는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인정의 상징물로 바뀐다. 아카키에게 외투는 나탈리의 사랑이란 목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지만 어느새 그를 차지하기 위해 ‘악마와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최종목표가 돼버린다. 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는 외투는 그렇게 실질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중시하는 현대적 삶을 풍자하는 상징물(오브제)이 된다.
연극은 이렇게 신체극, 이미지극, 사물극, 음악극의 요소를 총동원해 고골의 ‘외투’를 21세기적 상황에도 어울리는 보편적 이야기로 전환한다. 하지만 초반의 강렬한 이미지가 중반 이후 큰 차별 없이 전개되면서 극적 긴장감과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보편적 호소력에 치중한 결과 오히려 극의 구조가 밋밋해지면서 원작 고유의 깊은 맛을 살리지 못했다. 극한의 추위에서 생존을 위해 또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카키가 펼치는 고군분투가 여인에 대한 상투적 욕망으로 환치되면서 그 절박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춘천마임축제에도 초청돼 27, 28일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외투’라는 제목으로 공연된다. 033-242-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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