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양재기보다 옹기가 제맛… 모양은 좀 넓적해야… ‘막걸리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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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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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맴이 심들 때는/막걸리 한 사발 이기 보약 아이가/아, 요즈음 젊은 것들이야 먹을 끼 널려 가꼬/막걸리 요놈을 아주 상머슴 부리듯 하지만/내가 대가리 소똥 벗겨지고 난 뒤부턴/막걸리 요놈 한번 배부르게 묵고 싶어/두 눈깔이 막걸리 빛깔처럼 허옇게 뒤집혔다 안카나/막걸리 요놈은 출출할 때 맛이 으뜸 아이가/아, 오죽했으모 막걸리 요놈 쪼매 더 마실라 카다가/바람 난 마누라 보따리 싸는 줄도 몰랐다카이’

<이소리의 ‘막걸리타령’ 전문>》

막걸리는 농부의 밥이다. 촌로의 우유요 젖이다. 농부들이 논두렁 밭두렁에서 마시는 술이다. 소주는 홀짝홀짝 마신다. 막걸리는 벌컥벌컥 들이켠다. 맥주는 “캬아!∼” 소리 내며 마신다. 막걸리는 “쭈욱∼” 들이켠다. 소주는 지글지글 삼겹살 안주와 함께 털어 넣는다. 맥주엔 땅콩과 마른 오징어가 딱이다. 막걸리는 김치 한 보시기만 있어도 된다. 깍두기 한 접시면 그만이다. 안주가 없으면 어떤가. 텃밭 풋고추나 오이 몇 개 툭 따다가 막된장에 푹 찍어 먹으면 오케이다.

‘봄을 잊은’ 수상한 초여름이다. 비가 잦다. 서늘하고 축축하다. 이런 날은 걸쭉한 막걸리에 녹두빈대떡이 안성맞춤이다.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이나 서대문 영천시장 선술집에 퍼질러 앉아 ‘마른 논에 물 대듯’ 쿠르르∼ 목울대를 쿨렁댄다. 부추전 파전 호박전 두부전에 도토리묵…. 안주는 소박하다. 어쩌다 묵은 지, 곰삭은 홍어, 삶은 돼지고기의 삼합이라도 마주하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혀가 달뜬다.

광화문 교보문고 피맛골 대폿집들이 아련하다. 열차집(02-734-2849)은 종각역 부근 제일은행 옆쪽에 새 둥지를 틀었다. 65년 전통의 청일집(02-732-2626)은 르메이에르 빌딩 1층에 새로 자리 잡았다. 알큰한 어리굴젓과 노릇노릇 돼지기름에 부쳐내는 녹두빈대떡은 똑같지만 아무래도 옛날 정취가 덜하다. 세월의 더께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포도주 잔은 날아갈 듯하다. S라인이 눈썹달 같다. 맥주잔은 뭉툭하다. 밋밋하면서도 아래쪽으로 갈수록 묵직하다. 서울 여의도 63빌딩과 닮았다. 막걸리잔은 각양각색이다. 아무 사발이나 밥그릇에 콸콸 따라 마신다. 술집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 찌그러진 양은그릇이 있는가 하면 넙죽한 사발이 있다. 옹기종발이 있는가 하면 사기밥그릇으로 그냥 마시기도 한다.

막걸리는 시원해야 맛있다. 뜨뜻미지근한 막걸리는 ‘김빠진 사이다’ 같다. 옹기사발은 숨을 쉬면서도 외부온도에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더구나 소박하고 투박하다. 막걸리 이미지와 궁합이 맞는다. 양푼은 너무 값싼 느낌이 난다. 밖의 기온에 민감한 것도 약점이다.

막걸리는 보통 큰 술잔에 마신다. 그래서 대폿술이다. 대포(大匏)는 ‘큰 바가지’라는 뜻이다. “대포 한잔 어때?”라고 묻는 것은 ‘막걸리 한잔 하자’는 말이다. 옛날 선술집엔 ‘왕대포’라고 쓰인 깃발이 무수히 펄럭였다. 간첩들이 서울의 수많은 ‘왕대포’집에 놀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땅거미 어둑어둑 내릴 때마다, 발밑에 자꾸만 감기는 대폿집 깃발들. 눈을 들면 ‘술 거르는 용수’를 장대에 건 대폿집들이 깔깔거리고 있다. 결국 술꾼참새들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길 옆/주막//그/수없이 입술이 닿은/이 빠진 낡은 사발에/나도 입술을 댄다.//흡사/정처럼 옮아오는/막걸리 맛’ <김용호 1912∼1973 ‘주막에서’부분>

요즘 대폿집들은 대부분 옹기나 사발로 된 잔을 쓰지 않는다. 쉽게 잘 깨지고 이가 잘 빠지기 때문이다. 대신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사기종발 잔’을 쓴다. 오래 쓰면 색이 바래 술맛이 떨어진다. 요즘 젊은층들은 아예 와인잔에 막걸리를 마신다. 사기 소주잔에 막걸리를 홀짝이는 여성들도 있다. 앤드루 새먼 영국 더 타임스지 서울특파원은 “막걸리를 세제용기처럼 생긴 플라스틱 병에다 담아서 팔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한다. 결국 플라스틱병의 막걸리를 플라스틱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이 된다. 술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다.

술잔은 적정 음주량의 기준이다. 소주 한잔은 어디에서나 일정하다. 맥주잔도 그렇다. 막걸리 한잔은 백이면 백 모두 다르다. 막걸리 잔의 규격화가 필요한 이유다. 세계 ‘최고급 와인 잔의 대명사’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리델사 게오르그 리델 회장은 “같은 와인이라도 잔에 따라, 그 기울기가 달라지고 와인에 닿는 혀의 부위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막걸리는 다섯 가지 맛이 난다. 전문가들은 막걸리의 다섯 가지 맛을 한번에 보려면 아무래도 잔이 좀 넙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크기는 밥공기와 국그릇의 중간 정도가 알맞다고 말한다. 마침 요즘엔 컬러 유리잔, 손잡이가 달린 사기 잔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막걸리 전용 잔 개발에 발벗고 나섰다. 전남강진청자마을은 1월 막걸리청자주병과 막걸리청자술잔 60점을 특별 제작해 청와대에 납품했다. 주병은 1L와 1.5L들이로 5∼8잔이 나오는 크기.

조선 25대 임금 ‘강화도령’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은 막걸리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강화도에서 18세까지 나무꾼 떠꺼머리 총각 이원범으로 혼자 살았다. 부모도 없어 의지할 데라곤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외가뿐이었다. 원범은 바로 그곳 외가 부근의 약수터에서 양순이라는 처녀와 만나며 외로움을 달랬다.

나무꾼 원범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에 올라가 임금이 되었다. 공중에서 훨훨 날며 살던 새가 새장에 갇힌 꼴이었다. 철종은 늘 나무꾼시절을 그리워했다. 정치는 안동 김씨 몫이었다. 그는 툭하면 “궁중에는 왜 막걸 리가 없느냐”고 음식타박을 했다. 궁중의 진귀한 음식과 술도 그에게는 막걸리보다 못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중전이 친정집 노비를 통해 막걸리를 구해 ‘허기’를 채워주곤 했다.

철종은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강화섬 양순이도 평생 홀로 살다 죽었다. 철종의 무덤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예릉)에 있다. 강화도령 철종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밥이나 마찬가지다/밥일 뿐만 아니라/즐거움을 더해주는/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천상병1930∼1993 ‘막걸리’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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