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후반 이탈리아 프라토의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의 중요한 토요일 일과 중 하나는 시장에 들르는 일이었다. 하인이 빵이나 채소 같은 식재료를 사는 동안 다티니는 이발소에 들러 면도를 했다. 장터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평판을 강화한 것이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시장은 계층을 막론하고 중요한 생활공간이었다. 본래 소비 자체를 즐기는 현대의 소비문화는 18세기 산업혁명을 전후해 시작됐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그림과 서적, 당대 사람들의 서신 등을 통해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이미 ‘소비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1500년경 장터풍경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림 속에는 젊은 남녀가 물건보다는 오히려 상대에 집중하며 손을 잡거나 서로의 신체를 가리키는 모습이 등장한다. 시장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성적인 코드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시장 인근에는 늘 사창가가 있었다. 상점마다 가득 쌓인 상품은 화려한 볼거리였다. 행상의 요란스러운 목소리는 일종의 공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장에 들르는 일 자체가 당대 도시민들에게는 오락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는 주로 교회나 시 공회당, 궁 등 공공건물의 1층을 상인들이 임차해 상점으로 활용했다. 현대의 쇼핑센터를 연상시키는 상점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거지와 상업지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각 상점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간판으로 상품을 홍보했다. 주로 왕관, 천사, 태양 등 상징적 이미지가 등장했다. 16세기에는 각 상점의 간판을 사용할 권리가 마치 현대의 브랜드처럼 상속되거나 거래될 수 있는 저작권이 있는 상품으로 간주됐다. 골동품처럼 이전까지는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물건이 새로운 구매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도 르네상스 시기였다.
당대 사람들이 쇼핑을 즐겼다는 사실은 부유층의 소비행위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아라곤 가문의 이사벨라 데스테는 당대 사람들의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방대한 편지를 남겼다. 이사벨라는 단순히 가격이 비싼 상품이 아니라 뛰어난 품질을 지닌 혁신적인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즐겼다. 장갑 하나를 주문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에서 난 가죽으로 만들었는지까지 따져 보았다.
저자는 이 외에도 복권이나 경매, 면죄부 판매 등 당대의 다양한 소비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쇼핑이 지위나 종교,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즐겼던 사회적, 문화적 행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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