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아파트 거실에서의 오후, 창문 앞으로 푸드덕 날아드는 나방, 수조의 형광물고기, 달개비 잎사귀들…. 시인은 일상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작고 세밀한 움직임들을 차분히 포착해낸다. 무심한 듯, 담담한 언어로 직조되는 시편들 속에 삶의 애환들이 농축돼 있다.
“나는 지금 바늘구멍 속을 지나가고 있다/지겨운 머리통은 겨우 빠져나왔는데/어깨가 통 빠지지 않는다/이렇게 쌍봉낙타는 바늘구멍 속에 걸려 있다…나의 목걸이처럼 바늘을 목에 걸고 저 길을 걸었다/보게, 나의 이 기막힌 바늘 목걸이를/엉거주춤 바늘구멍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를/나는 지금 바늘구멍에 걸려 있다”(‘바늘구멍 속의 낙타’)
바늘구멍에서 머리통은 겨우 뺐는데, 몸통이 빠지지 않아 목에 바늘 목걸이를 달고 있는 시 속의 화자는 현실과 이상의 틈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과 닮아 있는 듯하다. 기술 문명사회에서의 피로감을 통찰한 시편도 보인다.
“문득, 통화권이탈지역으로 들어오고 말았다/소란한 세상을 닫아건 잎들의 무늬를 읽는다/그대 잠시 두리번, 결락된 감각을 찾는가/소리 없는 엽록체의 통화권이탈지역은/동물들의 울음과 이동이 찍히지 않는 영토…빛은 떠나고, 혼돈이 거니는 어둠 한쪽/완전 통화권이탈지역에서 너와 나는 오래전/서로 잃어버린 것을 조용히 만지고 있다.”(‘통화권이탈지역’)
식물적인 세계를 묘사한 시가 많은 점도 눈에 띈다. 그의 시편들 속에서 식물들은 여리고 조용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감각과 활력을 가진 열려 있는 세계, 번잡한 인간세상의 대안으로 그려진다.
“조용히 있어야 집중되고 물이 올라온다는 걸 안 풀줄기들/물소리, 아 물달개비들 날갯소리, 여름의 물 아우성/고무판 노란 오리물갈퀴가 뒤로 회똑 뒤집히면서 앗/몸이 출렁여, 온 태양의 들판엔 물질이 한창이다.”(‘달개비들의 여름 청각’)
‘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 등 시력 30년을 맞은 시인으로서 시작(詩作)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 시편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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