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자연을 품은 정갈함 노르웨이 스타일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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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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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위용을 드러낸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오페라 하우스 내부. 이 건축물은 피오르(흰 대리석)와 숲(갈색 원목)을 형상화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이 건물을 ‘노르웨이의 자존심’으로 꼽는다.
2008년 위용을 드러낸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오페라 하우스 내부. 이 건축물은 피오르(흰 대리석)와 숲(갈색 원목)을 형상화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이 건물을 ‘노르웨이의 자존심’으로 꼽는다.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발을 내딛던 순간부터 직감으로 알았다. 독종처럼 굴지 않고 살아도 되는 나라. 묵직한 언행의 미덕이 있는 나라, 축복 받은 자연 덕분에 절제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나라, 그곳이 노르웨이라는 걸.

오슬로 공항의 복도와 천장, 벽면의 마감재는 온통 연갈색 목재였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첫 이미지는 목선을 가린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여자였다. 화장기 없이 지적인 느낌을 풍기는 여자.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에서 ‘나’와 밤늦도록 와인을 마시던 ‘그녀’…. 출국을 앞둔 사람들은 노르웨이 나무로 인테리어된 대합실 카페에서 휴대전화를 걸고, 커피를 마셨다. 나무들 사이로 네온 핑크색 조명이 빛났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지만 인근 핀란드도 종종 스칸디나비안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형태와 선이 단순하고 엄격한 이 지역의 디자인은 1930년대 ‘스칸디나비안 그레이스(스칸디나비아의 우아함)’란 호평을 받으며 떠올랐다.

하지만 유독 노르웨이에서는 그동안 알바르 알토(핀란드 건축가)나 아르네 야코프센(덴마크의 산업 디자이너)과 같은 ‘빅 네임’을 찾기 어려웠다. 혹자는 인구 480만 명의 강소국 노르웨이의 국민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풍부한 오일 머니로 삶이 느긋한 노르웨이 사람들은 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걸 기피했다는 것이다.

허식 없이 사회와 소통하는 디자인, 청정한 자연과 교감하는 디자인, 전통 속에서 혁신을 빚는 디자인. 세계 디자인계는 2000년대 이후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상하는 노르웨이 디자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낯선 노르웨이 디자인의 생명력을 지난달 현지에서 만나봤다.》

○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소통형 건축

오슬로 시내에 있는 건축 스튜디오 ‘판타스틱 노르웨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캐주얼 차림의 엘렌 블락스타 하프네르 대표(30)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커피 드시겠어요?”

건축가 8명이 일하는 사무실은 2년 전에야 마련된 이 스튜디오의 보금자리다. 노르웨이 제2의 수도라 불리는 베르겐에서 건축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하프네르 씨는 2003년 1만2000노르웨이크로네(약 220만 원)를 주고 빨간색 중고 캠핑카를 샀다. 이 움직이는 사무실이 노르웨이의 혁신적 건축 스튜디오,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시초였다.

“건축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캠핑카로 노르웨이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건물을 지어,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었죠. 노르웨이 건축가들은 사람이 살기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늘 고민한답니다. 건축물은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하는 동시에 자원을 새로운 기회로 탈바꿈시키니까요.”

하프네르 씨는 오슬로에 사무실을 연 후에도 빨간 캠핑카를 운전하고 다니며 지역 주민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와플을 내놓는다. “많은 건축가들이 사람들과 교감하는 걸 두려워하죠. 그래서는 재미있는 디자인이 나오지 않아요.” 노르웨이 건축 사무소로는 유일하게 초대 받았던 2008년 이탈리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도 훈제 연어와 요구르트를 얹은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와플은 그 자체로 스타가 됐다.

판타스틱 노르웨이 멤버들은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DMY 국제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집 모양으로 만든 종이 박스를 뒤집어쓴 채 시내 곳곳을 누비는, ‘걸어 다니는 전시’를 했다. 겨울 내내 햇빛을 볼 수 없는 북쪽 보뢰 지방의 시내 광장에는 태양광을 닮은 인공조명을 설치했다.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이 햇볕을 쬐지 못해 우울해지면 안 되잖아요.”

노르웨이의 현대 건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지배를 받아 황폐해졌던 국가 정체성의 재건을 추구한다. 이른바 노르웨이식 사회민주주의다. 노르웨이의 유명 건축회사 스뇌헤타가 2008년 지은 오슬로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그 정신의 집결체다. 흰 대리석으로 노르웨이 피오르를 표현한 이 건축물은 ‘노르웨이=모던’이란 공식과 함께 노르웨이 디자인을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엘렌 블락스타 하프네르 대표(위)와 산업 디자인그룹 ‘안데르센 앤드 볼’. 빨간색 의자는 안데르센 앤드 
볼이 최근 유베 랜드스케이프 호텔에 납품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다.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엘렌 블락스타 하프네르 대표(위)와 산업 디자인그룹 ‘안데르센 앤드 볼’. 빨간색 의자는 안데르센 앤드 볼이 최근 유베 랜드스케이프 호텔에 납품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다.
○ 자연 친화 디자인, ‘안데르센 앤드 볼’

지도를 들고 헤매던 기자 앞에 원색의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토르비에른 안데르센 씨(34)가 손을 흔들며 마중을 나왔다.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던 ‘노르웨이 세즈(Norway says)’의 멤버였다. 노르웨이 세즈는 2002년 노르웨이 왕립 미술학교 출신 다섯 명이 의기투합한 국가대표급 산업 디자인그룹이다.

전날 만난 ‘판타스틱 노르웨이’의 하프네르 대표는 이 그룹의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곧장 아이폰을 꺼내들고 통화를 했다. “안데르센? 한국에서 기자 손님이 왔는데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 내일 오후 4시? 그래, 고마워.” 알고 보니 노르웨이 세즈는 멤버들이 하나 둘 독립하면서 지난해 9월 ‘안데르센 앤드 볼(Anderssen & Voll)’로 그룹명이 바뀌어 있었다. 안데르센 씨와 동료 에스펜 볼 씨(44)의 이름을 딴 것이다.

유럽식 아파트 2층을 사용하는 둘의 사무실엔 아늑하고 자유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청포도와 함께 대접된 순백색 커피잔 세트의 컵 받침은 디저트 접시라 해도 될 만큼 큼지막해 실용성이 돋보였다. 이들이 노르웨이 세즈 시절 만들어 팔던 제품이었다.

과거 노르웨이 세즈는 다양한 기업들과의 디자인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가구, 조명, 직물, 정보기술(IT) 등 여러 영역의 노르웨이 디자인을 세계무대에 알렸다. 노르웨이 디자인의 산실로 2004년 문을 연 노르웨이 디자인·건축센터 ‘도가(doga)’의 디자인 상점에도 ‘노르웨이 세즈 표’ 후추 가는 도구가 진열돼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색상 조합이 컬러풀한 아령을 연상시켰다고 말하자 안데르센 씨가 웃으며 말했다.

“선명한 원색의 배합은 주방용품 보다는 어린이 장난감에 주로 쓰여 왔죠. 요리를 하나의 놀이로 삼자는 메타포(상징)를 담은 디자인이었습니다.”

안데르센 앤드 볼은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냈다. 노르웨이의 유명 건축가 얀 올라브 옌센 씨와 뵈레 스코드빈 씨가 ‘노르웨이 국립 관광 루트’ 프로젝트의 하나로 건축한 ‘유베 랜드스케이프 호텔’의 의자를 만든 것이다. 고요한 노르웨이의 숲 속에 자리 잡은 이 호텔은 두 개의 통유리벽을 통해 외부의 자연을 고스란히 실내로 끌어들인다. 안데르센 앤드 볼은 사람, 건축, 자연이 어우러지는 명상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민속 디자인을 차용한 일체형(모노블록) 의자를 만들었다. 의자의 직물과 젖힘 기능 등엔 최첨단 기술을 접목했다.

“생태를 중시하는 새로운 디자인 철학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여러 개 겹쳐 쌓으면 구름처럼 보이는 흰 의자도 만들고 있어요. 햇빛의 고급스러운 질감을 디자인에 활용할 방법도 고민 중입니다. 자연은 노르웨이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볼 씨)
글·사진 오슬로·발레스트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 노르웨이 디자인의 원천, 색과 ‘끼’

오슬로에서 송네 피오르를 거쳐 서쪽 해변으로 이동하면서 마주친 노르웨이의 자연은 정말로 ‘선물’이었다. 산맥 어귀마다 쌓여 있는 순백색 눈의 형태는 때로는 웨딩 케이크 조각이었고, 때로는 달마티안 개였다. 호수는 유리구슬을 풀어놓은 듯 한없이 반짝였다.

그렇게 도착한 발레스트란 마을은 ‘노르웨이 스타일’의 정수였다. 어디서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만 하면 미술 전문 출판사 ‘타셴’의 화보집 같은 사진이 나왔다. 19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크비크네스 호텔에 짐을 풀고 호젓하게 마을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노르웨이의 유명 포토그래퍼 크누트 브뤼 씨(64)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푸마’ 모자를 눌러 쓰고 ‘니콘’ 카메라를 든 그는 “30년 넘는 포토그래프 작업을 되돌아볼 사진집을 펴내기 위해 내 나라 노르웨이의 매력을 사진에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흥겨운 파티에 온 듯 경쾌한 움직임으로 연방 사진을 찍었다. 그가 아이폰을 꺼내들고 보여준 그의 작품 사진들엔 전직 패션 디자이너다운 끼가 넘쳐흘렀다. 호숫가 물수제비 위에 다리미를 대서 마치 물을 천처럼 다리는 듯한 사진, 눈 속에 인형을 넣어 계란처럼 표현한 사진…. 노르웨이 태양빛의 바삭거리는(crispy) 느낌이 좋아 플래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그는 “노르웨이의 색은 어딘가 깊이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노랑도 파랑도 초록도 빨강도 저마다 묵직한 무게가 있었다. 뾰족 지붕 집들의 창가에는 레이스 커튼, 작은 화분, 흰색 새 모양의 목각 인형들이 있었다.

[1] 중세 시대 건축된 노르웨이 베르겐의 목조 건물들 [2] 발레스트란 마을의 한 가정집 지붕 디자인 [3] 빨간색 벽면과 초록색 창틀, 검은 고양이가 어우러진 발레스트란 가정집의 감각적인 색감 [4] 무즈 오브 노르웨이의 광고 비주얼 [5] 판타스틱 노르웨이가 혹독한 비바람을 견디는 디자인으로 암반 위에 지은 가정집.
그러나 노르웨이 디자인이 마냥 평화롭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즈 오브 노르웨이’란 패션 브랜드는 ‘파티를 벌이자’란 모토로 전통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풀어낸다. 네온 핑크색 남성 재킷과 팬티, 알록달록 점박이 양말….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문을 연 이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엔 할리우드 스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브뤼 씨와 악수를 하고 헤어진 뒤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 길에 떨어진 솔방울을 가만 주워 호주머니에 넣으며 ‘노르웨이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는 아마 고요하고 맑은 심성을 지녔으면서도 가슴속에 유쾌한 불덩이를 안고 있을 것이다. 비틀스가 부른 ‘노르웨이의 숲’의 ‘그녀’처럼….

오슬로·발레스트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노르웨이 디자인을 알고 싶다면


판타스틱 노르웨이 www.fantasticnorway.no

안데르센 앤드 볼 www.anderssen-voll.com

노르웨이 디자인·건축센터(도가·doga) www.doga.no

오슬로 국립 오페라 하우스 www.oslooperahouse.com

포토그래퍼 크누트 브뤼 씨 www.tinagent.no

무즈 오브 노르웨이 www.moodsofnorway.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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