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체를 독백체로 바꾸고, 탈춤 춤사위 등 한국적 동작을 접목해 원작을 권력욕에 불타는 귀족 대 민초의 투쟁으로 재해석한 극단 초인의 공연 ‘맥베스’. 사진 제공 인디마라
극단 초인의 ‘맥베스’ 권력투쟁에 희생되는 민초들의 고통 형상화 연출 ★★★☆ 연기 ★★★ 무대 ★★★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 죄의식에 정신병 걸려
‘환상과 실재의 힘’ 강렬 연출 ★★★★☆ 연기 ★★★★ 무대 ★★★★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우선 가장 짧다. 희곡 분량으로 ‘햄릿’의 절반밖에 안 된다. 셰익스피어의 전체 작품 중에서도 ‘실수연발’과 ‘템페스트’ 다음으로 짧다. 둘째, 햄릿과 리어, 오셀로와 달리 주인공 자신이 악당이다. 맥베스는 전쟁영웅이지만 왕을 암살하고 그 자리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정적의 가족까지 무차별 학살하는 범죄자다. 셋째, 극의 비극성이 외부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에서 발생한다. 소름끼치는 비극의 씨앗이 발아하는 것도, 곰팡내 나는 공포의 꽃을 피우는 것도, 시커먼 죽음의 열매를 달게 삼키는 것도 모두 맥베스 자신이다.
이 세 요소로 인해 ‘맥베스’는 빠르고 강렬하면서도 내면의 어두운 동굴을 탐험하는 반(反)영웅의 기상을 지니게 된다. 이를 한마디로 줄이면 ‘현대적’이란 말이 도출된다. 현대에 올수록 이 작품의 매력이 배가되는 이유다.
13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초인의 ‘맥베스’(박정의 연출)는 이런 해석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 작품은 ‘맥베스’를 권력찬탈자의 심리극이 아니라 권력투쟁에 희생되는 민초들의 정치극으로 풀어냈다.
연극은 이를 위해 대본을 대부분 독백체로 전환했다. 스코틀랜드 왕족과 귀족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민중의 절규까지 나란히 들려주기 위한 장치다. 맥베스가 전쟁영웅으로 개선의 기쁨을 읊을 때 “신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라는 병사들의 두려움에 찬 기도를 함께 들려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귀족들이 높은 단 위에서 권력투쟁을 펼치는 동안 그 아래서 민초들이 탈춤 춤사위를 닮은 집단적 몸짓을 펼치는 것 역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각화한 장치다.
하지만 귀족 대 민중의 대결구도는 권력이 아니라 정치 일반을 허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왕을 시해한 맥베스나 그를 토벌하는 맥더프나 모두 권력욕의 노예로 동질화하면서 옳고 그름의 분간조차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에서 현실적이던 맥베스 부인(서주희·오른쪽)을 광기와 죽음으로 몰고 간 ‘그것’을 형상화한 밀가루 반죽이뱀처럼 목을 휘감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물리반면 극단 물리의 ‘레이디 맥베스’(한태숙 연출)는 심리극적인 요소를 극대화함으로써 ‘맥베스’의 현대성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원작에서 맥베스 부인은 5막 1장에서 몽유병에 걸려 맥베스와 자신이 덩컨 왕을 시해한 사실을 궁중 전의와 시종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털어놓는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 장을 현대적인 정신과 치료 과정으로 환치한다. 그리고 최면을 통해 은폐, 억압된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으로 ‘맥베스’의 주요 내용을 응축해 보여준다.
여기서 맥베스 부인(서주희)은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이고 전의(정동환)는 정신분석의이다. 맥베스 부인을 사로잡는 ‘그것’은 칸트가 말한 물자체이자 라캉이 말한 실재다. 따라서 현실의 렌즈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연극은 이를 원일 씨가 만들어내는 쇳소리 가득한 음향과 구음(口音)으로 청각화하거나 이영란 씨가 밀가루와 진흙, 물을 이용해 펼치는 물체극을 통해 시각화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어둠 또는 진흙과 몸을 섞으면서 하얗게 빛나는 밀가루다. 때로는 먼지처럼 흩날리고 때로는 진흙처럼 덩어리졌다가 끝내는 맥베스 부인의 목을 휘감으며 현실을 잡아먹는 환상 내지 실재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적인 ‘맥베스’는 여성 주체적 연극으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동시에 ‘여자는 남자의 징후’라는 라캉의 명제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맥베스 부인이 남편보다 더 빨리 권력욕에 달아오르고 남편보다 더 빨리 파멸을 감지한다는 점을 더 극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i: 극단 물리 ‘레이디 맥베스’ 1만5000∼3만 원.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762-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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