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내 방은 콕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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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8일 03시 00분


비행 시뮬레이션으로 꿈☆을 이루는 사이버 파일럿들

변성보 씨(26·서울 강서구 가양동)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계기판을 점검하며 비행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의 비행구간은 김포공항∼제주공항 노선. 각종 버튼과 스위치를 차례로 작동시키고 이륙을 준비하면서 관제탑에서 전하는 날씨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도착지의 날씨 확인도 필수다. 김포공항 상공은 구름만 약간 있을 뿐 바람도 잔잔하고 가시거리도 길어 비행에 적합한 날씨다.

관제탑의 유도를 받아 비행기를 활주로로 이동시키는 변 씨. 관제탑의 이륙허가를 받은 뒤 엔진 출력을 높이자 제트엔진이 굉음을 내며 비행기를 앞으로 밀어낸다. 천천히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비행기는 금세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300피트, 400피트, 500피트….’ 고도계를 주시하며 상승속도를 조절하는 변 씨의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띠리리∼’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 휴대전화 전원을 끄는 것은 기본인데 조종사 변 씨가 ‘깜빡’한 것일까? 하지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여보세요’하고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 변 씨.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진짜 비행기가 아니라 PC로 구동하는 가상 비행 프로그램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를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순간만큼은 파일럿의 꿈 아쉬움 잊어”

변 씨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의 비행기를 조종하는 비행 시뮬레이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컴퓨터 운영체제 윈도를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제작한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플라이트 시뮬레이터(4.0버전)’를 접하면서 사이버 공간에서의 변 씨의 파일럿 경력이 시작됐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프로그램의 기능과 현실감을 더욱 높인 버전을 계속 내놓았다. 현재는 2006년 나온 시리즈의 열 번째 버전 ‘플라이트시뮬레이터Ⅹ’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대 의학전문대학원(1학년)에 재학 중인 ‘예비 의사’ 변 씨의 어린 시절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난시 때문에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접어야 했던 변 씨는 요즘 사이버 공간이긴 하지만 2, 3일에 한 번꼴로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이루지 못한 ‘빨간 머플러’의 로망을 달래고 있다. 지금까지 변 씨가 비행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록한 비행시간만 총 3000여 시간. 지난해 대한항공 주최로 열린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실력이 탁월하다.

컴퓨터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신나게 총을 쏴 적기를 격추하는 여느 비행게임과는 달리 지루하기 그지없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영문으로 된 비행교본을 독파하며 조작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야 해서 종종 인내심과의 싸움에 비견되기도 한다. 단 한 번 매끄러운 착륙을 위해 수십 번 넘게 추락을 경험해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이 게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변 씨는 “현실에선 이루기 힘든 하늘을 나는 꿈을 가장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비행 시뮬레이션을 하는 순간만큼은 파일럿이 되지 못한 아쉬움도 잊는다”고 말했다.

○ 해외선 시뮬레이션 마니아층 두터워

지금 이 순간에도 변 씨처럼 비행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0년 11월 인터넷 포털 다음에 개설된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카페 회원 수는 무려 3만7000여 명. 중고생과 대학생은 물론 30∼60대까지 회원들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남성 회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현직 파일럿이나 항공대 항공운항과 등에 재학 중인 예비 파일럿이나 관제사들의 활동이 활발한 것도 특징이다. 비행 시뮬레이션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이 카페의 공동운영자 김민규 씨는 “누구나 어릴 때 한 번 쯤은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지만 현실에서 비행기를 몰아 볼 기회를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비록 가상 세계지만 비행기를 조종해 구름 위를 넘나들며 만끽하는 ‘자유’가 비행 시뮬레이션이 제공하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선 아직까지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인구가 많지 않지만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선 가상공간에서 열차나 선박을 운행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마니아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새로운 항공기 모델이 출시되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구현이 가능하게끔 별도의 업데이트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 세계에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회사까지 성업하고 있을 정도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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