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시뮬레이터의 매력은 무엇보다 실제에 버금가는 높은 현실감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현재 상업적으로 운항 중인 다양한 항공기를 몰아 볼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실제 측정 자료에 따라 각국의 주요 공항이나 지형을 만들어 마치 전 세계를 컴퓨터 속에 옮겨 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사용자가 원하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날씨 데이터까지 반영할 수 있다. 지금 서울 상공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면 똑같은 환경 속에서 비행할 수도 있다.
○ 가상 항공사에서 비행시험도
동호인들의 몰입도도 취미생활 수준을 뛰어넘는다. 영문으로 쓰인 수백 쪽짜리 조종 매뉴얼을 구해서 일일이 번역해 가며 읽는 것은 기본. avism(www.avism.com) 같은 전 세계 비행 시뮬레이션 동호인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료를 찾아 시뮬레이션 비행 도중에 적용해 보기도 한다. 최신 기종의 항공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서 이 항공기를 몰아 볼 수 있게 외국 소프트웨어사가 개발한 유료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실행해 본 뒤 카페 게시판에 시승기를 올려놓고 공유한다.
혼자 하는 비행에 싫증이 나면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한 번에 여러 명이 편대 비행을 할 때도 있다. 서로에게 호출 부호도 부여해 인터넷 전화나 음성 메신저로 교신까지 주고받는다. 이런 활동은 주로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가상 항공사를 통해 이뤄진다.
가상 항공사 회원(이들은 스스로를 ‘사원’이라고 부를 만큼 자부심이 높다)들은 회사가 배정해 준 스케줄대로 시뮬레이션 비행을 한 뒤 비행기록을 제출해 숙련도를 평가받기도 하고 비행시간 등에 따라 훈련생에서 시작해 부기장, 기장으로 올라가는 등 자체 승진 제도도 운영한다. 외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해외 가상 항공사 회원들과 교류하는 활동도 벌인다. 국내 유명 가상 항공사 KOVA의 창립멤버 이석호 씨(38)는 “우리나라보다 시뮬레이션 역사가 길고 저변이 넓은 외국에선 60대 이상의 동호인들이 적지 않다”고 소개했다. ○ 나만의 조종석 만든다
키보드와 마우스에 만족하지 못하는 시뮬레이션 동호인 중에는 좀 더 현실과 유사한 조작을 위해 시뮬레이션 조종기기를 수입해 방 안을 개인 조종실로 꾸미는 이들도 있다. 대개 비행기의 방향과 출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춘 조종간(수만∼수십만 원대)을 구입하는 수준이지만, 수백만∼수천만 원씩 거금을 들여 실제 항공기와 거의 유사한 ‘콕핏(비행기에서 파일럿이 조종하는 공간)’을 방 안에 재현하는 ‘홈 콕핏족’도 있다. 이 씨의 경우 1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4t짜리 화물차의 적재함에 보잉737 기종의 콕핏을 본떠 만든 ‘홈 콕핏’을 1년 반째 제작 중이라고 했다.
훈련용 비행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대학 항공운항과 등에 납품하는 누리항공시스템 최공순 대표는 “현실에 가까운 비행 체험과 복잡한 항공기 시스템을 경험하고 싶어서 ‘항공사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동호인들도 있다”고 말했다.
항공관제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동호인들도 적지 않다. 일본 게임업체가 만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나는야 항공관제사’는 사용자가 사이버 공간에서 항공 관제사 역할을 하며 활주로 위의 비행기들을 유도하거나 항로를 설정해 안전하게 이착륙시키는 체험을 제공한다. 아이폰용 게임 애플리케이션 ‘Flight Control’은 휴대전화 화면 속에 있는 활주로를 향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항공기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터치해 서로 충돌하지 않게 안전한 경로를 설정해주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유료임에도 높은 다운로드 실적을 자랑한다.
○ 항공관제, 열차 시뮬레이션도 인기
열차 운행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마니아층도 많다. 일상에서 접하는 전철이나 열차를 소재로 한 데다 비행 시뮬레이션보다 조작이 비교적 간단해 시뮬레이션 초심자에게 인기가 높다. ‘전차로 GO’ 시리즈나 ‘레일팬’이 대표적인 열차 시뮬레이션 게임. 비행 시뮬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운행 중인 전철이나 열차 노선을 촬영한 실사 이미지를 배경으로 사용자가 열차 기관사처럼 규정 속도와 신호, 정차 위치 등을 준수하며 열차를 운행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레일팬은 미국 시카고 철도 노선을 3차원 촬영한 이미지로 만든 역들을 주행하는 체험이 가능해 마니아층의 애정이 두텁다. 일본 ‘타이토’사가 만든 전차로 GO 시리즈는 일본 도쿄 등지의 전철 노선을 직접 운행해 볼 수 있어 일본과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항공사 시뮬레이터는 기울기-진동까지 재현 시뮬레이터 직접 체험해 보니
항공사나 철도회사는 조종사나 기관사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수억∼수십억 원대의 시뮬레이터 장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시뮬레이터는 얼마나 현실감이 있을까? 대한항공과 서울메트로를 방문해 시뮬레이터 탑승체험을 해 봤다.
기자가 10일 대한항공 운항훈련원(인천 중구 신흥동)에서 탑승한 비행 시뮬레이터의 기종은 A300-600 모델. 주로 김포∼제주, 인천∼나리타를 왕복하는 기종이다. 기장석에는 기자가, 부기장석에는 대한항공 김형일 부기장이 앉았다. 김 부기장은 대학 4학년생이던 2005년, 대한항공이 주최한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콘테스트’에서 2위를 차지한 시뮬레이션 동호인 출신이다.
김 부기장의 도움을 받아 시뮬레이터를 조작해 비행기를 김포공항에서 이륙시켰다. 시뮬레이터 조종석 앞에는 6개의 프로젝터를 이용해 가상의 주변 경치를 눈앞에 펼쳐주는 거울이 달려 있다. 오른손으로 스로틀(엔진출력 가속장치)을 밀어 속도를 높이고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시뮬레이터의 앞부분이 올라가며 하늘로 치솟는 느낌이 난다. 시뮬레이터 밑에 있는 6개의 유압 피스톤이 파일럿의 기기 조작에 따라 시뮬레이터를 기울이거나 진동을 전해주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가능하다.
“왼쪽에 인천공항이 보이지요”라는 김 부기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10시 방향으로 돌리자 인천대교와 인천공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포공항 상공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크게 선회해서 김포공항 활주로에 다시 착륙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0여 분. 하지만 생생한 현실감과 긴장감은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만든다.
같은 날 서울메트로 인재개발원(서울 성동구 용답동)에서 탑승체험을 한 열차 시뮬레이터는 비행 시뮬레이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작이 단순했다. 하지만 시뮬레이터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 흥미로웠다. 지하철 4호선 기관차를 실제 크기로 재현한 시뮬레이터는 발차나 정차 시 몸이 앞뒤로 쏠리는 효과는 물론 레일을 달릴 때의 진동까지 재현했다. 브레이크를 풀고 가속레버를 작동시키자 정면 유리창 앞에 설치된 스크린 속의 화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행구간을 실사 촬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한 화면은 선로 주변 건물의 간판 문구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감이 높았다. 이날 운행 체험 구간은 지하철 4호선 남태령∼산본 구간. 지상과 지하 구간이 혼재돼 있어 기관사 훈련생들의 실습에 많이 활용되는 구간이라고 했다.
체험 중 졸음운행 예방을 위해 운행 도중 기관사가 항상 잡고 있어야 하는 운전자안전장치(DSD)에서 손을 떼 봤다. “안전운전 하십시오”라는 음성경고가 들리더니 자동 제동장치가 작동해 전차를 정지시켰다. 역사(驛舍)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플랫폼에 서 있던 승객이 선로 위로 떨어지는 상황도 설정할 수 있다. 비행 시뮬레이터와 달리 열차 시뮬레이터는 일반인의 체험이 가능하다. 서울메트로는 홀수 달 둘째 주 목요일에 일반인들에게 열차 시뮬레이터를 탑승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차량기지 등을 둘러보는 견학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견학을 희망하는 달의 전달 20일까지 서울메트로에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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