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당놀이를 연상시키는 단순 소박한 무대 위에 ‘현대의 신화’를 펼쳐낸 피터 브룩의 ‘11 그리고 12’. 주인공인 티에르노 보카(마크람 쿠리·가운데)가 어린 제자들에게 삶의 지혜가 담긴 우화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연극은 원래 이런 것” 소박美의 극치 보여줘
피터 브룩의 ‘11 그리고 12’ 연출 ★★★★ 연기 ★★★☆ 무대 ★★★
전설은 왜 항상 늦게 도착하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왜 늘 들끓는 록의 맛이 아니라 숙성이 끝난 ‘클래식’의 맛만을 핥아야 하는가. 영국 연극연출 거장 피터 브룩(85)의 작품으로 최초 내한한 ‘11 그리고 12’(17∼2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는 이런 아쉬움을 안겨줬다.
세계 연극사에서 피터 브룩이란 이름은 ‘잠들지 못하는 영혼’과 동의어였다. 스물하나에 로열셰익스피어극단(RSC)의 전신 셰익스피어기념극장에서 ‘사랑의 헛수고’를 연출했고 스물셋에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 제작감독을 맡을 만큼 천재로 꼽혔다. 창의적 무대연출과 획기적인 해석으로 젊은 나이에 보수적인 영국 연극계에서 최고의 셰익스피어 연출가 반열에 올랐지만 안주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영미권 밖의 연극이론을 흡수한 파격적 무대로 연극사에 기록될 작품을 계속 만들어냈다. 독일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프랑스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 이론을 결합한 ‘마라 사드’(1964년), 베트남전에 항의하는 온갖 혼성 예술의 종합세트였던 ‘US’(1966년), 인도의 대서사시를 9시간짜리 공연으로 펼쳐낸 ‘마하바라타’(1985년) 등이다.
제도권 연극의 총아로 출발한 그는 비제도권 연극을 소개하는 이단아가 됨으로써 그 성공을 이어갔다. 1971년 RSC 상임감독 자리를 박차고 파리국제연극연구소를 세운 뒤 파리 ‘뷔페 뒤 노르 극장’에 일체의 상업성을 배제한 순수연극의 영토를 세운 것이 그 정점이었다.
하지만 팔순의 나이를 넘기고 우리와 마주한 ‘연극의 전설’은 더 이상 그런 실험과 파격의 무대를 선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원적인 무대였다.
빨간 카펫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Y 형태의 나목 세 그루와 키 낮은 의자가 무대의 전부였다. 그 옆에선 한 명의 연주자가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이 일본인 연주자를 포함해 다인종, 다국적으로 구성된 7명의 배우가 다양한 배역을 돌아가면서 연기했다. 여배우 없이 남자배우들이 여성 배역까지 소화했다. 배로 강을 건너는 장면에선 두 명의 배우가 빨간 천을 접어 배 형태를 만들었다. 한국의 마당놀이와 너무도 닮았다.
온갖 연극이론을 섭렵해 ‘모든 연극학도의 스승’으로 불리는 그가 도달한 결론은 연극의 본원으로 돌아가기였다. 작위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스러운 이야기’ 자체에 충실한 것이다. 최소한의 무대와 최소한의 연출로 이뤄진 그것은 차라리 ‘무연출의 연출’이라 할 만했다.
무수한 연극이론을 탐험하던 그가 결국 폴란드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에 닻을 내린 것일까. 하지만 무대와 달리 배우들의 연기는 배역과 혼연일체를 강조하는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과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관객에게 연극과 현실의 상관관계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브레히트의 전통에 가깝다.
연극은 1930, 40년대 북아프리카에서 ‘완벽의 진주’라는 기도문의 암송 숫자를 놓고 벌어진 이슬람교 종파분쟁을 그린다. 자신이 속한 12번 암송의 전통을 버리고 11번 암송의 전통을 수용했다가 집단폭력에 희생된 수피교(신비주의 이슬람교) 지도자 티에르노 보카의 삶이 그 중심에 있다.
보카는 돈독한 신앙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타인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관용을 실천한다. 상대가 서양과학이건 프랑스의 제국주의이건 다른 종파이건. “신은 인간의 당황스러운 마음이다”라는 보카의 잠언은 바로 독선을 경계한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그의 행동이 변절로만 비칠 뿐이다. 맹목적 신념 앞에 상대를 존중하는 지혜는 곧 적(敵)이다. 그 무차별적 적개심을 가라앉히는 길은 자기희생밖에 없다. 보카는 그 적개심의 불꽃에 스스로를 불태우는 나비가 됨으로써 분쟁을 종식시킨다.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가 횡행하는 시대, 이 연극은 ‘현대적 신화’를 구축함으로써 병든 현실을 치유하고자 한다. 역시 고대 제의에서 출발한 연극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다.
하지만 대가의 ‘꽃 시절’은 못 보고 나목 시절만 접하게 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과연 피터 브룩이라는 문맥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연극을 접했을 때도 같은 감동에 젖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피터 브룩이란 문맥을 떼어놓고 이 작품의 미학을 논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신뿐만 아니라 대가도 가끔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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