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정사(正史)로 다뤄지는 역사서는 ‘사기’ ‘한서’ ‘삼국지’ 등 총 24사(史)다. 이 중에서도 사기와 한서는 왕조의 권위에 의해 공인됐다는 점과 기전체 형식(본기와 열전으로 나뉘어 있는 형식)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후대 중국의 역사서를 정사냐 야사(野史)냐로 가르는 기준이 된 대표적인 역사서다.
오늘날에는 사기에 비해 한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모든 시대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唐) 초까지만 해도 한서가 우세했다. 판세가 뒤집어진 것은 중당부터이며 명(明)대에 이르러야 사기의 명성이 완성됐다. 사기는 태고에서 한대까지를 다룬 통사이며 한서는 한대의 역사만 정리한 단대사라는 차이가 있지만 시기가 겹치거나 중복되는 내용이 있어 두 역사서를 여러 면에서 비교하기 좋다. 어떤 책을 더 높이 평가했느냐에 따라 이후 시대의 정치상황과 학풍을 함께 파악할 수도 있다. 중문학자이자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역대 정사의 맞수’로 불리는 두 역사서의 차이를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분석한다.
결론부터 요약하면 사기는 발분저서(發憤著書)이자 유교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반면 한서는 명철보신(明哲保身·밝고 지혜로워야 몸을 지킬 수 있다)의 책이자 엄격한 유교질서 아래서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체 또한 각각 고문(글자 수에 구애받지 않음)과 변문(정형성을 띤 문장)적 특색을 지닌다. 이렇게 된 까닭은 집필 동기와 시대적 배경 등에서 참작해볼 수 있다.
조상 대대로 사관이었던 집안 출신이지만 흉노 정벌군으로 나갔다 포로가 된 옛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에 처해진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일화는 유명하다. 사마천은 집필 동기를 밝힌 ‘태사공자서’를 사기 끝에 배치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이릉의 사건으로 화를 입었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며 “굴원은 추방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가 시력을 잃자 ‘국어’가 나왔다…모두 마음에 맺힌 게 있었으나 자신의 뜻을 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일을 기록해 장래에 자신을 알아줄 자를 기다린 것이다”라고 썼다. 그래서인지 그는 역경에 처했던 비운의 인물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유방에게 패한 항우를 황제의 전기인 ‘본기’에 넣거나 떠돌이에 불과했던 공자를 제후의 전기인 ‘세가’에 수록한 것이 그런 예다.
학문의 명가에서 태어난 한서의 저자 반고는 황제의 지시를 받고 역사 집필을 시작했기 때문에 순조로운 과정을 밟았다. 반고는 사기의 상당 부분을 참고했으며 사마천의 필치 역시 높게 평가했지만 그가 유학의 오경을 소홀히 했으며 극형에 처해진 발분으로 사기를 저술했다는 점에서 불만을 드러냈다. 유교적 기풍이 확고해진 시대에 왕조는 세계의 중심이었으므로 반고는 왕조의 악한 일은 본기에서 기록하지 않고 열전으로 옮겨놓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미화에 애를 썼다. 예를 들어 도망치던 유방이 수레 속도가 느려질까 봐 자식들을 수레에서 떨어뜨리는 에피소드를 사기는 본기에서 다루지만 한서는 다른 곳에서 다룬다. 유방이 항우 군대에 쫓겨 달아나는 장면도 사기에서는 “한왕은 도망치다가…”로 쓰는 반면 한서에서는 “한왕은 뛰다가…”로 표현한다.
이렇다 보니 문벌귀족과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넉 자, 여섯 자로 글자수를 맞춘 글)이 성행할 때는 한서가 높이 평가받았지만 과거 관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당, 진한의 문장을 높이 사고 정열적인 문학을 추구했던 고문사파가 우세한 명대에 이르러서는 사기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역사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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