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삶이란…물고 물린 욕망의 변주곡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3일 03시 00분


체호프 심리극 기승전결 해체
17개 핵심장면으로 재구성

인간은 ‘욕망의 호수’ 맴도는
‘갈매기와 같은 존재’ 보여줘

연극 ‘갈매기’
연출 ★★★☆ 연기★★★★ 무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재구성한 우리극연구소의 ‘갈매기’. 니나 역의 김소희 씨(오른쪽)가 연인이었던 트레플레프 역의 이승헌 씨에게 욕망의 호수를 맴돌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갈매기에 비유해 털어놓고 있다. 사진 제공 이원양 한양대 명예교수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재구성한 우리극연구소의 ‘갈매기’. 니나 역의 김소희 씨(오른쪽)가 연인이었던 트레플레프 역의 이승헌 씨에게 욕망의 호수를 맴돌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갈매기에 비유해 털어놓고 있다. 사진 제공 이원양 한양대 명예교수
안톤 체호프 원작의 기존 ‘갈매기’가 코스요리라면 9일 막을 올린 우리극연구소의 ‘갈매기’는 뷔페요리다. 그 뷔페요리의 셰프는 4막으로 구성된 원작을 해체한 뒤 17개의 핵심적 장면만 발췌해 재구성한 연출가 윤광진 씨다.

첫 장면부터 의미심장하다. 주요 등장인물이 별장 거실에서 로또게임을 즐기는 동안 남자주인공 트레플레프(이승헌)가 권총 자살하는 극의 마지막 장면을 과감히 앞으로 끌어내 배치했다. 반면 마지막 장면은 원작에서 그 트레플레프가 여주인공 니나(김소희)와 감미로운 사랑을 속삭이던 1막의 장면이다.

시간적 순서를 뛰어넘는 이런 구성은 ‘갈매기’를 처음 보는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텅 빈 무대에 이동식 나무판자와 의자 몇몇을 이용한 ‘최소주의’ 무대세트도 이 작품이 여배우 아르카지나(남미정)와 그의 아들 트레플레프의 호숫가 별장을 무대로 한다는 점을 모르는 관객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 유산계층의 일상에 대한 지루한 세부묘사를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극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 심리극의 키워드는 ‘질투’다. 17개의 압축된 장면 중 질투라는 단어가 여섯 번 등장한다. 트레플레프는 어머니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작가 트리고린(지현준)을 능가하는 작가가 되길 열망하고, 트레플레프의 연인인 니나는 아르카지나와 같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트레플레프와 니나는 호숫가에서 자신들의 그런 열정을 담은 연극을 무대화하지만 냉소적 반응에 좌절한다. 니나는 예비작가인 트레플레프를 대신해 트리고린에게 빠져든다. 반면 트레플레프는 어머니와 연인의 사랑을 모두 앗아간 트리고린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선망과 질투의 이중주는 네 명의 주인공에만 그치지 않고 주변인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별장의 영지를 관리하는 샴라예프(한상민)의 딸인 마샤(함수연, 한채경)는 트레플레프를 짝사랑하고 그의 어머니 아나드레예브나(이슬비)는 아르카지나를 찬미하는 의사 도른(염순식)을 짝사랑한다.

원작에선 이런 삼각관계가 서서히 드러난다. 하지만 연극은 그런 심리를 묘파한 장면만을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반복은 웃음을 낳는 법. 트레플레프와 니나의 관계에선 그토록 비극적이던 삼각관계가 주변부로 옮아가면서 희극적으로 변모한다.

그 희비극의 중심엔 아르카지나 역을 맡은 남미정 씨가 있다. 남 씨는 보통 우아하게 그려지는 아르카지나를 자신의 욕망에 투철한 그로테스크한 속물로 변모시키며 진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는 아들과 연인의 죄책감을 무기로 삼아 제 욕망의 허울을 지킨다. 하지만 라캉의 말처럼 욕망은 늘 욕망의 주체를 배반하기 마련이다. ‘욕망의 챔피언’이던 아르카지나는 결국 아들을 잃고 연인과도 결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한다.

아쉬운 점은 연극이 아르카지나의 이런 희비극성을 새롭게 구축하고도 트레플레프와 니나의 비극적 사랑으로 되돌아간 점이다. 연극은 ‘체호프는 자연주의의 함정에 빠진 상징주의 작가’라는 미국의 무대미술가 아널드 애런슨의 발언을 토대로 생략과 비약을 통해 ‘텍스트의 여백’에서 새로운 상징을 길어내고자 한다. 인간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란 호수 주변을 맴도는 갈매기와 같은 존재라는 게 그 핵이라면 신선할 것도 없다. 그보다는 아르카지나의 비극이라는 자연주의적 해석에 방점을 찍는 것이 것이 더 참신하지 않았을까.

우리극연구소의 주축을 이루는 연희단거리패가 자랑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갈매기’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기본 줄거리를 파악하고 보는 것이 좋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1만5000∼3만 원.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게릴라극장. 02-763-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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