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서울지역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가 교외선 전차 노선을 폐지하고 버스로 대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불편을 겪게 된 주민들은 즉시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포, 청량리, 왕십리 등 각 지역에서 기성회를 결성해 주민대회를 개최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반대운동은 이듬해 2월까지 계속돼 결국 전차 노선 폐지를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주민 대표자는 일제에 협력해온 조선인 유력자나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다. 운동 방식도 관계기관에 대한 로비와 진정 등 체제 순응적이었다. 하지만 전차를 많이 이용하는 서울 외곽지역 거주민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노선이 폐지될 경우 주로 일본인이 거주했던 남부지역으로 개발이 집중돼 조선인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았다. 전차 노선 폐지 반대운동을 일제에 대한 저항 혹은 적응 중 한쪽 성격만 지녔다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상수도, 토지, 학교, 교통 등 공공 영역은 조선에 사는 이들의 생활을 위한 것이면서도 일제가 일방적으로 만든 공공질서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를 ‘식민지 공공성’의 관점으로 바라본 학술서 ‘식민지 공공성, 실체와 은유의 거리’(책과함께)가 최근 출간됐다. 윤해동 성균관대 HK(인문한국)연구교수,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나미키 마사히토 일본 페리스여학원대 교수 등 12명의 논문이 담겨 있다.
서문을 쓴 윤 교수는 “그동안 식민지 시기 정치사 연구는 독립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독립을 말하기 어려웠던 일반인들의 일상 속 정치에 주목하자는 차원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식민지 공공성’은 공공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인 현상들을 지칭한다.
서재길 서울대 HK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조선어 방송과 식민지 공공성’에서 주로 일제강점기 통치수단이었던 라디오방송에 주목했다.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은 1933년 4월 조선어 전용 제2방송을 시작했다. 조선의 아악과 민요, 설화 등을 방송하기도 했다. 일제는 통치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인의 관심을 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라디오는) 식민지 지배권력과 식민지 민중 사이의 헤게모니가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식민지 공공 영역의 일부”라고 분석했다.
이기훈 목포대 역사학과 교수는 ‘1920, 30년대 보통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당시 보통학교 설립을 둘러싼 지역갈등을 다뤘다. 당시 일제는 1면 1교, 혹은 3면 1교로 학교 수를 규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학교를 각자의 생활권 내로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면민대회나 진정서 제출, 등교거부 운동은 물론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교수는 “제국주의 국가권력이 모든 공(公)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 주민들의 입장에서 공을 전유해 나름대로 자신의 권익을 지키려는 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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