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청산리대장정’이 만든 질긴 운명의 끈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5일 03시 00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기념연극 ‘나는 너다’ 연출 겸 제작 윤석화 - 주연 송일국

《겉으론 웃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 뒤엔 팽팽한 긴장감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과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의 교차였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교환했다. 거기엔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이란 동질감과 ‘당신만 믿는다’란 간절함이 뒤척이고 있었다.》

[尹] 宋씨의 김좌진 장군 행적 순례 알고 출연 제의

[宋] 독립운동가 후손 의무감 느껴 ‘노 개런티’ 선언


연극 ‘나는 너다’(정복근 작)의 제작과 연출을 맡은 윤석화 씨와 주연을 맡은 송일국 씨에게선 그렇게 질긴 ‘운명의 끈’이 느껴졌다. ‘나는 너다’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기념해 만든 작품. 그러나 단지 민족영웅을 찬미하는 공연이 아니라 남다른 중량의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연극이다.

연극 ‘나는 너다’는 영웅의 아들이었기에 더욱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안준생의 관점에서 아버지 안중근의 위대함을 새롭게 조명한다. 제작과 연출을 맡은 윤석화 씨(왼쪽)와 안준생과 안중근의 1인 2역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하는 송일국 씨. 원대연 기자
연극 ‘나는 너다’는 영웅의 아들이었기에 더욱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안준생의 관점에서 아버지 안중근의 위대함을 새롭게 조명한다. 제작과 연출을 맡은 윤석화 씨(왼쪽)와 안준생과 안중근의 1인 2역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하는 송일국 씨. 원대연 기자
이 연극은 안 의사를 그의 ‘아킬레스건’에서 건져낸다. 바로 막내아들 준생이다. 안 의사가 서거할 당시 세 살이었던 준생은 친일파로 훼절된 삶을 살아야 했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1939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뜻으로 서울 남산 기슭에 세워진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하고 이토의 아들에게 사죄한 ‘패륜아’로서 공식 역사에서 폐기됐다.

연극은 준생의 삶을 복원하면서 그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아버지 같은 영웅의 길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야말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사람 아니었겠느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2008년 12월 연출 제의를 받은 윤 씨는 “이제 우리도 위인의 뒤에 감춰진 아픔을 드러내고 품에 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락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초 지난해 11월 전국순회공연을 목표로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자금 문제로 엎어졌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려는 순간 송 씨가 나타났다.

지난해 여름 제작팀과 중국 하얼빈을 찾았던 윤 씨는 안 의사 기념관에서 송 씨의 남다른 행적을 접했다. 송 씨가 외증조부인 김좌진 장군의 행적을 순례하는 ‘청산리역사대장정’을 2001년부터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윤 씨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출연 제의를 꺼냈다.

송 씨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연극무대엔 첫 도전인 데다가 웬만한 배우들도 어려워하는 안중근과 안준생 1인 2역을 소화해야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단아로 낙인찍힌 안준생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송 씨는 “뭘 모르니까 덤벼든 거죠”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거기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겪었던 애환과 의무감 같은 것이 더 컸다.

“연극에서 준생은 가족을 보살피지 못한 아버지 혼령에게 대체 독립은 무얼 위한 것이냐고 울부짖습니다. 그 순간 안 의사는 ‘바로 너를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9월 그가 최종 수락의사를 밝힌 날은 제작 취소가 결정된 날이었다. 윤 씨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라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다 제작까지 맡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1월 공연이 연기되면서 송 씨의 출연이 불확실해졌다. MBC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신불사)’에 전력투구 중이었기 때문이다.

“11월 공연이 무산되면서 마음을 접었죠. 그런데 ‘신불사’에 출연하면서 제가 교만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8개월간 몸만들기를 하며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방송을 보니 겉만 번지르르한 모델이 서 있더라고요. 4월에 드라마가 끝나고 재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가슴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배우자’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송 씨는 어려운 제작여건을 알고 ‘노 개런티’를 선언했다. 윤석화 씨는 그런 송 씨와의 인연이 질긴 운명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명의 끈을 더 강하게 느끼는 쪽은 송 씨였다. 어머니 김을동 씨가 사재를 털어 중국에 김좌진 장군 유적지에 기념관들을 지으면서 자금난에 허덕일 때마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배역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청산리대장정 코스에 고구려 유적지와 안중근 의사 유적지가 포함돼 있었는데, TV 드라마 ‘주몽’에 이어 연극 ‘나는 너다’의 출연까지 이어진 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신기(神氣)가 연극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윤 씨는 이렇게 답했다. “송일국과 같은 스타가 있다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27일∼8월 22일 서울 중구 장충단길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공연하는 ‘나는 너다’에는 박정자 씨가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로, 배해선 씨가 부인 김아려 여사로 출연한다. 3만∼8만 원. 02-3672-3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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