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해피엔딩 보면 ‘속이고 있구나’ 생각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7일 1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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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스토리텔링의 비결? 간단하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감(感)만 있으면 된다."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을 만든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69)이 15일 개막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시아제작배급사 회고전'에 초청돼 한국을 찾았다. 기동전사 건담은 1979년 TV 시리즈로 만들어진 뒤 'Z건담' '뉴 건담' 등 30여 개 속편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토미노 감독은 비현실적 슈퍼로봇이 아닌 실제 군용 무기를 닮은 '모빌슈트'를 내세워 세계 애니메이션 작가와 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는 건담 탄생 30년을 기념해서 작품 속에 설정했던 사양과 같은 18m 높이의 건담 모형이 설치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5일까지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극장판 시리즈를 비롯한 8편의 건담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다. 16일 부천 한 호텔에서 만난 토미노 감독은 "하나의 정교한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지 못한 공상과학(SF) 콘텐츠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코흘리개 시절 오로지 로켓과 우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철들며 보게 된 SF 애니메이션과 영화들은 대부분 나를 화나게 했다. '왜 저렇게 허술할까' 싶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할 수 있을 만한 것에 대한 집요한 공상. 그 결과물이 '건담'이다."

건담을 포함해 '이데온' 등 토미노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대개 결말이 비극적이다. 주요 등장인물이 몰살당하거나 정신이상이 돼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한다. 그는 어린 시절 방영됐던 '고지라' 등 인기 TV 시리즈를 언급하며 "시청자를 우롱하는 허황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미장센(장면 구성)과 특수 분장이 부실한데다 무조건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결말이 우스꽝스러웠다는 것.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린이용 콘텐츠라고 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무시하고 억지스럽게 밝은 마무리를 내버린다면 어린이를 기만하는 것이다. 관건은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다.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세계관을 담는 도구일 뿐이다. 수십 년 뒤에도 풍성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은 것이어야 한다."

-잦은 비극적 결말 때문에 토미노 감독이 우울하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나 궁금해 하는 팬이 많은데….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것은 제작사 경영자들의 생각이다. 작가가 출자자들의 생각을 따를 필요는 없다. 해피엔딩 이야기가 전부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아가서, 행복한 이야기를 본다고 해서 관객이 어떤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다. 행복한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어른들의 바람일 뿐이다. 현실이 마음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는 것, 사실 현실은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어린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해피엔딩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행복해지기는커녕 '애들을 속이고 있구나' 생각했다.

-첫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에는 카쓰, 레쓰, 키카라는 꼬마들이 등장했다. 이야기 결말에서 그들은 폐허만 남은 전장에 남겨진 미래의 희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속편인 'Z건담'에서 사춘기 청소년이 된 세 아이들은 지극히 냉소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쓰는 겁 없이 전투에 나섰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기까지 한다. 이 캐릭터들 역시 '얘들아,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말을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지.

"물론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그 이전에 '현실적인 사춘기 소년'이 등장한 적이 있었나 싶다. 나에게는 카쓰라는 캐릭터가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딱히 그런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린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가 있다면.

"꼽을 수 없다. 한 컷 한 컷 제대로 만들어냈다고 자신하는 캐릭터는 악역이든 주인공이든, 출연 분량에 상관없이 모두 사랑스럽다. 완벽하게 그려내지 못한 캐릭터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낀다. 지금까지 그려낸 캐릭터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먹었던 만큼 제대로 완성 못한 것이 그 정도쯤 된다. 어떤 것들이냐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건 캐릭터에 대한 결례다.

-'기동전사 건담'은 기계 병기보다 그 배경이 된 시공간의 세계관이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스페이스 콜로니'라는 신대륙을 설정하고 그곳으로 이민을 간 시대를 '우주세기'라 지칭한 것 등, 남다른 스케일을 가진 이야기였다. 성장기에 어떤 경험을 쌓았기에 그런 두툼한 텍스트를 짜낼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필요한 것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감(感)뿐이었다. 우주라는 공간을 잘 이해하고 나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창작해내듯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거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모든 창작물은 나름의 탄탄한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전제 아닌가. 사람이 살고 있는 몇 개의 스페이스 콜로니라는 공간을 달과 지구 사이에 설정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지구에도, 달에도, 스페이스 콜로니에도 사람이 사는 시대…. 이것은 지구 위 여러 나라에 여러 민족이 나눠져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다.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입장의 차이, 세력 다툼, 전쟁…. '건담'의 이야기는 그렇게 발전시킨 거다. 시공간을 잘 마련해 놓으면 캐릭터와 이야기는 일정 부분 스스로 만들어진다. 나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오로지 로켓과 우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만화보다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철들면서 접한 SF 애니메이션과 영화들은 대부분 나를 화나게 했다. '왜 저렇게 허술할까' 싶었다. 어린 시절 인기리에 방영됐던 괴수 특수촬영 TV 시리즈 '고지라'도 그랬다. 괴수가 나오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야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건 기술적으로도 날림에 가까웠다. 연출자가 '할 수 없었던 디테일'과 '하지 않은 디테일'의 차이를 시청자는 알아본다. 그 배경에는 '애들이 보는 거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있었을 거다. 관건은 그림이 아니다. 이야기다. 원반형 우주선이 날아오고 외계인이 나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무성의에 대한 반발심 덕에 미래 어느 시기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할 만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공상할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이 '건담'이다. 내가 진심으로 명작이라 인정하는 SF영화는 오직 하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는 정말 싫어한다. 그건 그야말로 그냥 어린이용 영화다. 애니메이션은 이제 '특별한 장르'가 아니다. 건담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시장과 작업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치열함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실무자나 제작자나 모두 시야가 좁아졌다. 이것이 요즘 누구나 오래 보고 만족스럽게 즐길만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라고 본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창작이 아니라 샘플의 '복제'에 가깝다. 지금까지 나왔던 좋은 작품들을 잘 편집해서 매끄럽게 재가공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크리에이터'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다. 납득하기 어렵다."

-일본 애니메이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떤 영상물이든 그 안에 내포하는 텍스트의 깊이와 두께가 차츰 줄어들고 있는, 불행한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나.

"동의한다. 열정이 식은 '답보의 시대'다. '익숙함'이 보편화된 까닭 아닐까. 사람 탓만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건담'은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보다 평범한 주변인물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경향을 보였다. 세계는 한두 사람의 히어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나.

"멋진 해석에 감사한다.(웃음)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해 처음에 등장했던 주변 인물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속편 시리즈는 작가가 주도하지 않는다. 제작자의 계산에 의해 나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뉴건담'에서 오랜 주인공인 샤아와 아무로가 죽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부활을 기대하는 팬이 많은데….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말기 바란다. 팬의 그런 기대가 나는 무섭다. 비즈니스 마인드로 팬의 기대에 의존해 무성의한 속편을 자꾸 내놓으니까 탄탄했던 스토리가 파탄을 맞는 거다. 요즘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에서라면 '에이리언' 시리즈처럼 죽은 주인공의 남겨진 DNA를 복제해 부활시킬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재미가 있을까. 판권을 보유한 회사에서는 아마 돈벌이가 된다면, '이야기의 가치'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을 거다. 간단한 예가 있다. 내가 아닌 사람들이 건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건담과 전혀 관계 없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계획은 없나.

"나이가 있다 보니 장담은 못하겠다.(웃음) 하지만 최근 3년 정도 여러 가지 꼼꼼히 살펴보면서 꾸준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한 가지 있다. 기회가 닿으면 작품으로 선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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