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릉(순종 부부의 무덤)의 조성 과정과 석물의 특징에 배어 있는 일제의 선전 의도를 분석한 연구서가 최근 나왔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김이순 교수의 ‘대한제국 황제릉’(소와당).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은 순종이 임종 당시(1926년)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일제가 황제릉으로 꾸몄다. ‘황실을 보호한다’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의 명분을 살리는 동시에 당시 고조된 항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도였다.
유릉에선 신도(神道·무덤으로 들어가는 큰길) 양쪽에 석물을 배치해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전통 왕릉에서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봉분 주변에만 석물이 있었다. 또 유릉의 석물은 기존 왕릉의 석물에 비해 유독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일제는 석물 조각에 일본인 유명 조각가 등을 동원했고 기존 왕릉 조성 기간이 3∼5개월인 데 비해 유릉 신도의 석물 조성에만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들였다.
김 교수는 “바로 옆에 있는 홍릉(고종 부부의 능)의 석물은 중국의 본을 받아 옹색한 반면 유릉에 나타난 일본의 기술과 예술은 근대적이라는 것을 일제가 유독 강조하려 했다”고 말했다. 서양식의 일본 예술작품을 조선의 주요 유적지에 남기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김 교수는 “옛 홍릉(명성황후릉)에 있던 석물을 일제가 유릉 장식에 쓰려다 포기했는데 그 석물들이 지금도 유릉 안 언덕에 방치돼 있다”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만 왕릉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말했다.
한편 김 교수의 저서에는 홍릉에 대한 분석도 실렸다. 수릉(壽陵·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으로 1900년 고종이 조성을 시작하면서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위상을 다지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야기된 정치·외교적 혼란과 쇠락해가던 국력 때문에 석물 조각의 맵시가 예전만 못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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