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피맛골 연가’에서 김생(박은태·왼쪽)과 홍랑(조정은)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창작뮤지컬 ‘피맛골 연가’(배삼식 작·유희성 연출)는 양파껍질 같은 뮤지컬이다. 표면에는 재개발로 옛 자취를 잃은 종로의 이면도로 ‘피맛골’에 대한 향수와 러브스토리가 수놓인다.
작품은 피맛골 살구나무를 중심으로 서얼 출신 서생 김생과 양반댁 규수 홍랑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언뜻 익숙한 구조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환유와 은유의 연쇄 고리로 이어진 환상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피맛골은 뒷골목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뒷골목인생=쥐구멍인생이란 점에서 서출(庶出) 김생=서선생(鼠先生) 쥐로 이어진다. 쥐는 자정을 전후한 자시(子時)를 대표하는 존재로 다시 이승(아침)과 저승(밤)을 넘나드는 신화적 존재로 변신한다. 몸통얼룩쥐와 꼬리얼룩쥐로 나뉘어 대립을 펼치는 쥐는 이념분쟁의 몸살을 앓아온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우화적 존재이기도 하다. 춤추고 노래하는 40마리 쥐들의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캣츠(Cats)’와 비견해 ‘랫츠(Rats)’라 부를 만하다.
김생의 캐릭터가 쥐라는 동물적 상상력과 연결된다면 홍랑의 캐릭터는 살구나무라는 식물적 상상력과 결합한다. 살구나무에는 행매(杏梅·양희경)라는 중매쟁이 혼령이 깃들어있다. 모든 생령의 짝짓기를 돕는 행매는 모성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 살구나무를 껴안으며 일체감을 토로하는 홍랑이 김생의 생명을 구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나, 행매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는 김생을 쥐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피맛골을 무대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 환상, 풍자를 녹여낸 창작뮤지컬 ‘피맛골 연가’의 남녀 주인공 박은태 씨와 조정은 씨. 홍진환 기자김생 역의 박은태 씨(29)와 홍랑 역의 조정은 씨(31)가 배우로서 거친 역정도 작품의 이런 중층구조와 공명한다. 박 씨는 가수연습생과 뮤지컬 앙상블 배우로 시작해 올 초 뮤지컬 ‘모짜르트!’의 주역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신예다.
“2006년 ‘라이언 킹’ 앙상블로 뮤지컬에 입문한 뒤 성량이 작다는 이유로 주역 오디션에서 계속 미끄러졌어요. 2008년 ‘노트르담 드 파리’ 오디션에서 그랭그루아 역으로 발탁되면서 새 인생이 시작됐죠.”
뮤지컬 배우로서 성량이 작다는 것은 배역의 한계로 작용한다. 출신 때문에 출사(出仕)길이 막힌 김생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 오디션에선 마이크를 착용한 상태로 가창력을 평가받은 점이 ‘쥐구멍에 볕들 날’로 작용했다.
조 씨는 데뷔 초부터 ‘베르테르의 슬픔’과 ‘미녀와 야수’ 등의 로맨틱 뮤지컬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도맡아온 ‘공주과(科)’ 여배우였다. 하지만 2007년 ‘스핏 파이어 그릴’을 끝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 올 초 이율배반적 사랑을 그린 ‘로맨스, 로맨스’에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작품 보는 눈도 바뀌었어요. 예전엔 할 수 있는 역과 할 수 없는 역이 딱 나뉘었는데 이제는 어떤 역이라도 도전해보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역모죄로 부모를 잃고 온갖 고초를 겪은 뒤 피맛골로 돌아온 홍랑의 이미지와 겹치는 대목이다.
평생 한눈팔지 않고 뮤지컬 배우로 남고 싶다는 두 사람은 대중성과 심층성을 겸비한 대본 못지않게 ‘싱글즈’와 ‘형제는 용감했다’의 장소영 씨가 작곡한 음악을 이 작품의 최대 매력으로 뽑았다. 김생이 불우한 처지를 한탄한 ‘푸른 학은 구름 속에 우는데’와 사랑의 이중창 ‘아침은 오지 않으리’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지녔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면서 티켓 가격을 소극장 뮤지컬 수준인 2만∼5만 원으로 설정한 점도 매력적 관객 유인 요인이다. 9월 4∼1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02-399-1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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