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 ‘꽃밥’ 전문>
찜통더위 후유증일까. 영 입맛이 없다. 입안이 깔깔하다. 소문난 맛 집을 찾아가도 별로다. 우선 밥부터가 맛이 없다. 식당 밥은 너나없이 밥알에 풀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아침에 미리 담아놓은 밥이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꾹꾹 눌러 담은 밥. 밥그릇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밥뚜껑에 소름 돋듯이 돋은, 맥 빠진 물방울들. 사람들은 그 밥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김빠진 밥, 풀 죽은 밥, 찰기라곤 하나도 없는 밥. 그런 밥이 몸속에 들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섬 지역 식당에 가면 더하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해산물은 더없이 싱싱한데, 정작 기본인 밥맛이 못 따라간다. 예로부터 쌀이 귀해서 일까. 하지만 요즘은 섬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쌀을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밥 짓기에 습관적으로 관심이 덜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일본에 가면 어딜 가나 밥맛이 좋다. 하다 못해 간이음식점 밥이나 편의점도시락 밥맛도 한국의 웬만한 식당밥보다 낫다. 쌀이 한국보다 좋아서 그럴까. 아니면 밥 짓는 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밥맛은 ‘쌀-물-불-솥’의 어우러짐에서 나온다. 그래야 뜸이 잘 든다. 뜸은 쌀이 골고루 잘 익도록 하는 마지막 풀무질이다. 불땀이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하다. 솥 안의 쌀들은 서로 서로 껴안고 천천히 몸을 익힌다.
쌀은 햅쌀일수록 구수하고 차지다. 기름이 자르르하다. 오래되면 묵은내가 난다. 구수한 맛이 사라진다. 햅쌀은 늦가을 한철이다. 귀하다. 그렇다면 ‘갓 도정한 쌀’이 으뜸이다. 그 어떤 식품이라도 싱싱한 것이 맛도 좋다.
물은 적당히 부어야 한다. ‘적당한 물’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은 식구 수에 따라 밥 짓는 쌀과 물의 양을 귀신같이 조절한다. 정작 어머니 혼자일 땐 그냥 찬밥으로 때운다.
불은 쌀에 ‘맛을 불어넣는 기운’이다.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듯이 불을 다뤄야 한다. ‘센 불-중간 불-약한 불’로 지은 밥과 ‘약한 불-센 불-약한 불’로 지은 밥은 각각 그 맛이 다르다. 가스불이냐, 장작불이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장작불은 처음부터 센 불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밥은 솥 맛’이다. 무슨 솥을 쓰느냐에 따라 밥맛이 확 달라진다. 냄비 밥이냐, 돌솥 밥이냐 아니면 무쇠솥 밥이냐에 따라 밥알이 달리 익는다. 1809년 발간된 여성생활백과 규합총서는 “밥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질그릇에 잿물을 발라 구운 뚝배기)이 그 다음이다”라고 말한다. 1924년 일제강점기 발간된 이용만의 한국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선 “밥은 곱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 다음이요, 무쇠솥이 셋째다”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밥맛 좋기로 소문 난 식당들은 대부분 곱돌솥이나 무쇠솥을 쓴다. 간혹 내열 도자기솥, 수정원석 솥, 섭씨 1200도에서 구워낸 천연유약옹기솥 등도 있지만 주류는 어디까지나 이들 두 가지이다.
서울 인사동 입구의 일본식솥밥 조금(02-725-8400), 해물산채돌솥비빔밥 인사동큰집(02-734-3234), 평창동가나아트센터 앞 영양돌솥밥 강촌쌈밥(02-395-6467), 신문로 구세군회관 뒤 곤드레무쇠솥찹쌀밥 나무가 있는 집(02-737-3888), 홍대앞 굴돌솥밥 돌꽃(02-324-5894), 대치동 돌솥밥한정식 진미가(02-561-3223), 충남 간월도 큰마을영양곱돌솥밥(041-662-2706) 등이 그렇다.
무쇠솥이나 돌솥은 솥뚜껑이 무겁다. 밥이 끓을 때 김이 잘 새지 않는다. 압력밥솥뚜껑이 무거운 것도 바로 이들의 장점을 본뜬 것이다. 열이 서서히 골고루 퍼진다. 쌀이 구석구석 잘 익는다는 말이다.
무쇠 솥은 밑바닥이 둥글게 나와 있다. 가운데 부분은 가장자리보다 거의 두 배나 두껍다. 열이 잘 퍼질 수밖에 없다. 바닥에 누르스름하게 앉은 누룽지는 으뜸이다. 돌솥 누룽지보다 더 맛있다. 콩이나 보리 기장 조 등 잡곡을 넣은 누룽지는 맛있다 못해 황홀하다. 꼬들꼬들 바삭바삭 고소하다. 솥바닥에선 몸에 좋은 철분성분까지 우러나온다. 곱돌솥도 열을 받으면 미네랄성분과 원적외선을 방출해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한다.
“치이∼치글치글∼”. 무쇠솥에 그때그때 지어먹던 집밥. 하지만 이제 어머니가 해주던 그런 꽃밥은 거의 없다.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에서 울고 있는 보온 밥이 있을 뿐이다. 회사원들이 사먹는 점심이나 저녁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밥을 아예 건너뛰는 사람도 많다.
밥은 한식의 처음이요 끝이다. 기본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하얀 도화지이다. 반찬은 그 백지 위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일 뿐이다. 백색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꽃을 피운다.
밥 한 톨, 밥 한 술, 밥 한 끼 제대로 먹기가 얼마나 힘든가. 밥풀때기라고 우습게보다간 큰일 난다. 밥 한 톨이 하늘이다.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야 한다. 그리고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 너무 싹싹 핥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개밥그릇은 ‘가부좌 튼 밥그릇 경전’(이덕규 시인)인 것이다.
밥술이라도 제대로 뜨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 밥값을 하려면 간과 쓸개는 일찌감치 집에 놔둬야 한다. 강호에서 밥투정은 금물이다. 그러다간 밥숟갈 놓기 십상이다. 밥줄 끊어진다. 밥벌이의 고단함. 솥은 밥맛을 모른다. 하지만 솥은 밥맛을 살린다.
‘우주의 중심은 어디?/식탁 한가운데 오른 밥/천수답에 잠긴 하늘에서 건져 올린 달/어머니 물 항아리에서 건진 별/거울보다 더 환하게, 아프게/눈을 찌르는 무색무취의 빛//고가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와, 밥/앞에 무릎을 꿇네/뜨겁게 서려오는 하얀 김/얼굴 붉어지네/밥이 무거운 법(法)이네’ <김석환 ‘밥이 법이다’에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