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오막살이 집 한 채’에서)
사랑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저녁 빛 받는 연잎과 어둠에 박힌 별을 떨게 할 수 있을 만큼? 물론 우리는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다. 장석남 씨의 새 시집은 그러나,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을 무색하게 한다. 사랑은 가령, 묵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묵의 매끄러운 살은 연인의 부드러운 살을, 입 안에 오래 남는 떫은맛은 그만큼 오래가는 사랑의 상처를, 묵을 뜰 때의 아슬아슬한 수저질은 사랑에 뒤따르는 불안한 떨림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이 묵 같은 것이었다니, 시인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일이다!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서늘함에서/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떫고 씁쓸한 뒷맛에서/그리고//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묵집에서’) 아침저녁으로 개고 펴는 요는 또 어떤가. ‘요는 깔고 몸을 뉘는 물건/사랑을 나누는 물건/어느 날 죽음을 맞는 물건/(…)요를 펴고 누워/하늘을 부른다/몸은 요를 부르는 물건/사랑은 요를 부르는 물건/죽음은 요를 부르는 물건/꽃을 펴듯 요를 편다’(‘요를 편다’에서)
“겉모습이 귀공자처럼 생겨서 젊은 시절 한때 영화배우로도 캐스팅된 적이 있지만 그는 사실 섬사람이다. 섬사람이 섬을 떠나 도회로 와 문명인이 되려 할 때의 슬픔을 나 역시 조금은 알 듯하다.” 극작가 최창근 씨는 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 슬픔은 시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인이 소중하게 열어 보이는 것들은 이를테면 저녁볕, 나리꽃, 구름이다. 시인의 귀는 물소리가 수척해지는 것을 듣고(‘여름의 끝’), 기러기 떼가 커다란 달밤을 떠메고 내려앉아 쉬는 것을 본다(‘인제에서’). 이 화려한 이기(利器)의 문명에서 그가 노래하는 이 자연의 시들에서는 그리움이 그윽하게 풍겨난다. ‘허기진 창자를 삐뚜름히 비추는 저녁볕/노는 아지랑이//솥을 열다//서쪽을 열고/뺨에 서쪽을 빛내다’(‘서쪽 1’에서)
시인의 말은 사뭇 겸손하다. 춘천휴게소 뒤편에서 한 남자가 처음 보는 악기의 줄을 고르는 것을 본 시인. 바람이 잣나무를 밀어 흔들고 산등성이 아래에서까지 별이 빛나던 때, 그는 “그 악기의 이름이 혹 시였을까? 그가 조율하던 것이 혹 사랑이었을까?”라고 말한다. 많은 말로 쌓아놓은 시편을 그때 그 사내가 만지던 줄의 떨림과 견줄 수 있겠느냐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시를 다 지우다’라는 제목의 시가 시여서 다행이다. 행여 실제였다면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시편들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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