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백제의 美, 긴 잠에서 깨어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27일 03시 00분


17년 대역사 백제문화단지 내달 문열며 부여-공주서 ‘2010 세계 대백제전’

백제가 1400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20일 일출 무렵 까치발을 하고 돌담 너머로 감상한 충남 부여군 정림사터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품격 있는 모습. 오른쪽은 ‘백제의 미’를 대표하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백제가 1400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20일 일출 무렵 까치발을 하고 돌담 너머로 감상한 충남 부여군 정림사터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품격 있는 모습. 오른쪽은 ‘백제의 미’를 대표하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눈을 감아도 그의 기품 있는 풍채가 잔상(殘像)이 된다. 수줍은 연정을 품게 된 것이다.

8월의 중순 새벽 아침. 그를 찾아갔다. 서둘러 재회하고 싶은 조바심. 이른 시간이라 입장객을 아직 맞지 않는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하염없이 바라봤다. 동쪽 하늘에선 해가 떠올랐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아침 안개와 일출이 어우러져 수묵화 느낌의 사진이 됐다.

그는 충남 부여군에 있는 국보 제9호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다. 백제의 다른 목조 건축물이 죄다 불타 사라질 때 1400년을 꿋꿋이 견뎌온 석탑.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침 안갯속의 정림사 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grace)한 우아미의 화신’이라고 썼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도 했다.

폭염이 내렸으나 그를 갈구하는 마음을 막을 바는 아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또다시 그를 보러 갔다.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그는 평탄한 옥개석(屋蓋石) 때문인지 자기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는 남자 같았다. 쌍꺼풀 없는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그래, 그래. 괜찮아’라고 위로해주는 남자. 판석 마무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은근한 유머 감각도 갖춘 남자. 누군가 이 석탑이 왜 여자가 아닌 남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련다. “성정(性情)은 장중한 바위이되, 목탑 양식의 모습으로 단정하게 살아온 ‘남자의 지고지순’이 전해져요”라고.

정림사터 오층석탑을 향한 흠모는 백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마침 올해 ‘대충청 방문의 해’를 맞아 다음 달 18일∼10월 17일 부여군과 공주시에서 ‘2010 세계 대백제전’도 열린다. 그간 고구려와 신라의 휘황찬란한 기세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백제 역사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도 10월 방송될 예정이다. 백제의 둥근 해가 떠오르고 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해 많은 저술을 해 온 이광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는 “왜 하필 지금 백제일까요?”란 후배 기자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백제가 가진 중용(中庸)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자극과 극단이 과한 시대에 누가 봐도 편안한, 부담스러운 기교를 부리지 않은 백제의 미(美). ‘나이키’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그 담결(淡潔)한 미를 찾아 나섰다.
왼쪽 위부터 다음 달 문을 여는 부여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무령왕릉 내부 모습, 부여 궁남지에 핀 연꽃. 부여·공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왼쪽 위부터 다음 달 문을 여는 부여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무령왕릉 내부 모습, 부여 궁남지에 핀 연꽃. 부여·공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우아한 인간미의 백제 답사 준비

성인이 돼서 다시 떠나는 수학여행인 셈이었다. 우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 이광표 기자의 공저 ‘한국미술의 미(美)’를 입문서 삼아 정독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저서 ‘나무야, 나무야’에서 “스산한 고도(古都)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고작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비극을 미화하는 감상(感傷)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걸 기억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 건국된 백제는 이후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475∼538년), 사비(지금의 부여·538∼660년)로 옮기며 문화를 꽃피웠다. 웅진시대는 무령왕릉과 출토 유물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인 시기다. 백제인의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만들어진 사비시대는 세련된 공예가 발달한 백제 문화의 절정기였다.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고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은 백제 미의 특색을 ‘우아한 인간미’로 정의했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대해선 “백제의 미소를 띤 이 불상은 비종교적인 종교 조각이라고 할 만큼 인간적”이라고도 했다.
1993년 능산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나온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 소장).
1993년 능산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나온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책장을 들출수록 백제는 온유한 연꽃으로 피어났다. 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답사가 아니라 풍광 기행에 불과하다는 유홍준 교수의 일침이 따끔해 1박 2일의 부여·공주 답사 코스엔 유적지 이외에도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 관람도 포함시켰다. 백제 문화라면 고작 얄팍한 상식을 지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갑론을박한 개념의 늪에 빠져 허우대지 말자. 나만의 상상력으로 편견 없이 백제에 다가서자’란 결심을 했다.

연꽃같은 수줍은 미소로 반기는 “아! 백제여…”

○ 백제금동대향로와의 대화

김영혜 충남 문화관광 해설사는 말했다.

“부여 답사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합니다. 아침엔 운치 있는 안개를 담요처럼 덮은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궁남지의 연꽃을 둘러보세요. 오후에 부소산을 산책하고 난 뒤에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1300여 점의 전시 유물들과 대화를 하세요.”

부소산행까지 그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 뒤 국립부여박물관에 갔다.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 중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1993년 능산리 절터 발굴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인 향로 앞에서 나는 한참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용틀임으로 이뤄진 향로 받침, 연꽃과 도교의 봉래산을 형상화한 몸통, 날개를 활짝 펴고 정면을 응시하는 향로 뚜껑의 봉황 등은 놀랍도록 역동적이고도 정교했다.

선이 날렵한 용의 두상 앞에선 엉뚱 발랄하게도 고대 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미국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 ‘베오울프’의 금룡(金龍)도 떠올렸다. 백제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용이 고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는 혼돈의 화신이었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둘의 이미지는 흡사한 측면이 있었다. 용이 땅에서 떠받치고 봉황이 하늘을 지켜주는 금동대향로에는 갖가지 동물들과 악사들이 살고 있었다. 그 향로와 잠시 상상의 대화를 나눴다.

▽기자=“당신은 위덕왕, 무왕, 의자왕에 걸친 백제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더군요.”

▽향로=“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고, 위덕왕의 아들인 무왕은 걸출한 기상으로 백제인의 사기를 높였소. 의자왕의 왕권도 한동안은 강력했다오. 실은 나는 백제의 영화(榮華)를 가득 담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곡선의 운율이 되고 싶었소.”(참조: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의 미’, 박영규의 ‘백제왕조실록’)

▽기자=“당신이 온몸에 담고 있는 태평성대가 역사적 해석이 분분한 의자왕 때라면….”

▽향로=“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거지 같은’ 전설을 맹신하오? 백제를 두 번 욕되게 하지 마시길. 어느 옛 시인이 읊었다고 하잖소. ‘강산이 이토록 좋으니 의자왕은 죄가 없도다’라고.”(참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백제 특유의 지붕 장식물인 ‘치미’가 있는 부여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천정전.
백제 특유의 지붕 장식물인 ‘치미’가 있는 부여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천정전.

○ 힘찬 백제의 기상, 치미와 하앙

부여를 다루는 여행 책자들은 다시 쓰여야 한다.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이 확정된 1994년부터 무려 17년이 걸린 백제문화단지가 다음 달 용안(龍顔)을 드러내기에.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일대에 국비와 민간자본 등 6094억 원이 투입돼 329만4000m²(약 99만6000평)에 재현되는 1400년 전 백제의 모습이다. 대목장, 단청장, 번와장(번瓦匠·지붕 기와를 잇는 장인), 각자장(刻字匠·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장인), 칠장 등 5개 분야 중요 무형문화재의 손길을 거쳐 사비궁, 능사, 위례성 등이 자리를 잡았다. 백제로 여행을 떠나려면 이젠 백제문화단지부터 들르고 볼 일이다.

한국 방문의 해 위원회와 충남도의 협조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백제문화단지를 미리 둘러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 왕궁으로는 최초로 재현된 사비궁에 들어섰다.

웅대한 기상을 느끼기 위해 궁궐의 가장 중심 건물인 천정전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엔 연꽃무늬 타일이 자지러지게 피었다. 이른 새벽 궁남지의 연꽃, 공주 무령왕릉의 전돌과 국립부여박물관의 수막새(수키와의 한쪽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한 것)에 새겨져 한껏 눈에 익은 그 연꽃….

안내를 맡은 충남 백제문화권관리사업소의 이강복 씨는 백제의 미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 ‘치미(치尾·용마루 양쪽 끝에 얹는 특수 장식물 기와)’와 백제 건축의 특징인 ‘하앙(下昻·45도로 경사지게 돌출해 처마를 지탱하는 구조물)’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새의 깃털이 모티브인 치미는 대형 사찰에만 사용돼 극히 드물게 출토되는 백제의 귀한 유물이다. 부소산 절터에서 출토된 후 복원돼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게 유명하다. 건축물의 품격과 권위를 드러내는 치미를 사비성 지붕 끝에서 볼 수 있게 된 건 흐뭇한 일이었다.

현존하는 백제의 목조 건물이라곤 없는데도 문헌 연구, 발굴 조사로 드러나는 사출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를 토대로 귀중한 백제를 살려내신 분들, 능사 앞 연못에 달이 비치는 각도까지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한 분들,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은근한 오방색으로 물든 부여 백제문화단지의 하앙. 하앙은 처마를 지탱하는 백제의 구조물이다.
은근한 오방색으로 물든 부여 백제문화단지의 하앙. 하앙은 처마를 지탱하는 백제의 구조물이다.

○ 백제의 섬세한 손 맛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한 무덤인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 도중 무덤의 주인공인 백제 제25대 무령왕에 대한 묘지석이 발견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 무덤 주인을 확인한 최초의 왕릉일 뿐 아니라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고분이었던 것이다.

무령왕릉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본 108종 2906점의 유물 중엔 유럽의 그 어떤 장식미술보다 빼어난 기술력의 금속 공예품이 수두룩했다. 박물관 측은 매우 작은 크기의 금 장신구들 앞에 돋보기를 놓아 관람객들이 백제의 장인정신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곳에서 내 마음은 고귀한 왕비가 됐다. 2mm 두께의 얇은 순금 판에 인동당초와 불꽃 무늬를 새긴 관(冠)장식(국보 제154호)은 왕이 비단모자에 꽂았던 것이라 하는데, 보면 볼수록 그 섬세함에 탄복하게 된다. 검은 옻칠을 한 표면에 금판으로 육각형의 거북 등 무늬를 만들어 붙인 왕의 베개, 용 장식의 왕비 은팔찌 등은 백제 왕실이 향유했던 공예미술의 극치였다. 국립부여박물관의 은자루 유리공 머리 장신구도 로맨틱했다. 공 표면에 잎 모양의 은판 네 장을 붙이고, 가운데엔 하트 모양을 투각했다. 왜 우리는 전통 공예의 우수성을 애써 간과한 채 서양의 금속공예만 해바라기처럼 쳐다봤는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백제문화단지 사비성의 오방색 단청도 백제의 미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생각했다. 명도와 채도를 일부러 낮춰 기품을 갖춘 색감은 은근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요즘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들이 심취해 있는 뉴 미니멀리즘(간결함을 추구하는 문화적 흐름인 미니멀리즘의 재유행)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왕조의 옛 도읍인데도 여태껏 군 단위인 부여, 송산리 고분군 이외엔 장대한 유적이 없는 공주. 두 곳은 인고의 세월을 거쳐 바야흐로 손님을 맞을 채비가 됐다. 세계 대백제전을 맞아 그동안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던 부여엔 롯데리조트, 공주엔 한옥마을 숙소가 새로 생겨났다. 우아한 백제 마마, 뒤늦게나마 때를 만나셨으니 부디 행복하소서.

부여·공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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