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우걱우걱 입안 가득 맛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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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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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에 고기와 쌈장을 얹으면…쌈밥

“일곱 여덟 장의 상추 위에 밥 한 숟가락 푹 퍼 담고, 보리새우젓 반 숟갈 넣고, 또 밥 반 숟갈 정도 퍼 얹고, 된장 조금 넣고 켜켜로 싸면 간이 고루 잘 맞아서 좋다. 이걸 양손에 들고 밥태기 뚝뚝 떨어뜨리면서 두 눈 부릅뜨고 우적우적 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번만 싸면 배가 부르기 시작하고 다섯 번 싸면 볼이 아프니 밥 한 그릇이 어느새 다 없어진다. 지금은 사시장철 마음만 먹으면 상추를 먹을 수 있지만 상추도 여름 뜨거운 햇볕을 먹고 텃밭에서 고실고실 자란 것이라야 맛이 있는 것이다.” <박형진의 ‘변산바다 쭈꾸미통신’에서>

햐아∼, 상추쌈 한 번 싸는 데 상추가 무려 7, 8장이나 필요하다니! 무슨 상추를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싸먹을까? 입이 얼마나 크면 그걸 한입에 다 넣을까? 쯧! 쯧! 거기에 밥과 고기까지 얹어 먹으려면 볼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기야 쌈밥은 눈 흘기며, 입 찢어져라 먹는 맛이다. 점잖은 선비조차 갓 쓰고 상추쌈 먹다가, 하마 입을 만드는 바람에 갓끈이 끊어졌을 정도였다.

선비는 원래 상추쌈 먹을 때 볼이 불거지면 안 된다. 상추를 손바닥에 놓고 먹어서도 안 된다. 먼저 숟가락으로 밥을 뜬 뒤, 그 위에 젓가락으로 상추 두 세 잎을 반듯하게 덮는다. 그 다음 밥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고 곧바로 장을 찍어 먹었다. 제 맛이 날 리가 없다. 결국 시나브로 선비들도 손바닥에 상추를 놓고 싸서 먹게 됐다. 가끔씩 입도 마음껏 벌려 커다랗게 싸먹었다. 입맛이 체면을 이긴 것이다.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의 상추쌈에 관한 시가 재밌다.

‘밥숟갈 크기는 입 벌릴 만큼/상추 잎 크기는 손 안에 맞춰/쌈장에다 생선회도 곁들여 얹고/부추에다 하얀 파도 섞어 싼 쌈이/오므린 모양새는 꽃봉오리요/주름 잡힌 모양은 피지 않은 연꽃//손에 쥐어 있을 때는 주머니더니/입에 넣고 먹으려니 북 모양 일세/사근사근 맛있게도 씹히는 소리/침에 젖어 위 속에서 잘도 삭겠네’

쌈은 뭐로든 쌀 수 있다. 보자기처럼 너풀거리는 채소나 산채 바다풀이라면 다 좋다. 상추 쑥갓 머위잎 호박잎 연잎 곰취 배추 깻잎 고구마잎 콩잎 참나무잎 치커리 미나리 김 미역 다시마…. 내용물도 뭐든 넣을 수 있다. 쌀밥 보리밥 오곡밥 삼겹살 등심 생선 멍게 전복 문어 오징어 젓갈 강된장 생마늘…. 한순간 보자기처럼 대충 싸서 입이 터져라 밀어 넣으면 그만이다.

쌉밥은 일단 입 안에서 터지기 시작하면 온갖 맛이 어우러져 황홀하다. 강된장의 짭조름 구수한 맛이 나다가, 갑자기 생마늘이 우지끈 깨물리면서 코를 톡 쏜다. 멍게 젓의 향긋한 바다냄새가 나는가 하면, 한순간 삼겹살의 고소한 맛이 솔솔 풍긴다. 쌈밥은 ‘입 속의 비빔밥’이다.

상추는 채소의 왕이다. 상추쌈은 ‘국민 쌈’이다. 날로 먹을 수 있는 야채라는 뜻의 ‘생채(生菜)’에서 비롯됐다. ‘생채→상치→상추’의 과정을 거쳐 굳어졌다. 하우스상추는 겉만 번드르르하지 텃밭 상추처럼 고소한 향기가 없다. 억센 ‘대지의 땅기운’을 맛볼 수 없다. 상추쌈엔 쑥갓도 넣어야 맛이 살아난다. 쑥갓의 그 향긋하고 담백한 맛은 쌈밥을 백배 천배 맛있게 한다. 또 있다. 생마늘도 한쪽 넣으면 그 깨무는 맛이 쏠쏠하다.

서울 논현동 원조쌈밥(02-549-3768),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앞 강촌쌈밥(02-395-6467), 신촌 창천동 초당쌈밥(02-313-0537), 연희동 녹원쌈밥(02-336-9483), 잠실역 신천동 유기농쌈밥 수다(02-415-5300), 경주쌈밥골목의 삼포쌈밥(054-749-5776), 구로쌈밥(054-749-0600) 등이 붐빈다.

경남 남해엔 밥도둑 멸치쌈밥이 있다. 멸치가 손가락 크기가 되는 5, 6월이 제철이다. 뼈가 연하고 향긋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난다. 뼈째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자글자글 끓인 생멸치찌개 속의 멸치를 건져 상추쌈을 해서 먹는다. 찌개 속의 시래기 고구마순도 일품이다. 남해 삼동면의 우리식당(055-867-0074), 여원(055-867-4118), 단골식당(055-867-4673)이 이름났다.

쌈맛은 손맛이 우선이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상추는 부드럽다. 호박잎은 꺼끌꺼끌하다. 곰취는 두툼하고, 머위잎은 약간 푹신하다. 삶은 양배추 잎은 야들야들하다.

손맛은 곧 입맛으로 옮겨간다. 곰취나 머위 쌈은 혀끝에 약간 씁쓰름한 맛이 걸린다. 호박잎은 목구멍을 시원하고 간질간질 쓸고 내려가는 맛이 좋다. 밥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밥물에 찐 호박잎이 으뜸이다. 양배추는 끓는 물에 삶아 찬물에 헹군 뒤, 물기를 빼내 싸먹는다. 고소하다.

쌈밥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쌈장이다. 보통 된장에 고추장을 섞어 만든다. 깨소금, 참기름이나 사이다를 넣어서 맛을 부드럽게 하기도 한다. 다진 마늘이나 땅콩 ,호두, 참깨, 해바라기 씨, 호박 씨, 불린 콩을 갈아 넣는 식당도 있다. 강된장을 끓여서 쓰기도 한다. 강된장은 집 된장 몇 숟가락에다가 쌀뜨물(멸치육수)을 붓고 애호박, 다진 마늘, 양파, 청양풋고추 등을 넣어 되직하게 끓이면 된다. 생선조림이나 간재미무침 멸치조림 같은 것을 얹어 먹어도 맛있다.

쌈밥과 고기는 실과 바늘이다. 요즘 아이들은 고기가 없으면 쌈밥을 먹지 않는다. 삼겹살구이(대패밥삼겹살), 불고기, 제육볶음, 샤부샤부 등 뭐든 고기를 얹어줘야 밥상에 다가앉는다. 삼겹살구이엔 누가 뭐래도 상추쌈이 어울린다. 쑥갓 깻잎으로 싸먹어도 괜찮다. 들큰한 불고기나 제육볶음은 씁쓰름한 씀바귀 케일 치커리가 제격이다. 샤부샤부는 배추속이나 상추로 싸먹는다.

쌈장도 궁합이 있다. 상추나 곰취 등 아삭아삭 날로 먹는 쌈엔 되직한 된장고추장 쌈장이 어울린다. 삶은 양배추나 밥물에 찐 호박잎쌈은 국물이 약간 있는 강된장이 제격이다. 짭조름한 젓갈을 얹어 먹어도 괜찮다. 깻잎 참나물 등 향이 강한 것은 생선회와 같이 먹으면 잘 맞는다. 비린내가 가신다.

한국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수저를 사용한다. 쌈밥은 손으로 먹는 밥이다. 주먹밥과 함께 희귀한 예다. 수저는 어디까지나 보조기구일 뿐이다. 손맛과 입맛이 하나다. 어릴 적 고향집 마당 평상에 온 식구 둘러앉아, 서로 눈 흘기며 먹던 상추쌈밥. 그리워라, 그 소박한 밥상 공동체.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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