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순하게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삶은 늘 어딘가가 꼬여 있다. 잘 풀려간다 싶으면 이내 제동이 걸린다. 권여선 씨(45)의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이 인생이란 것을 문장으로, 텍스트로 보여준다. 공들여 직조한 문장들이 이어질 때 술술 읽히는 듯하다가도, 어떤 마침표에는 손가락을 올려놓고 오래 머무르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때는 말하자면, 인생이 죽 나아가다가 턱, 걸린 순간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사랑을 믿다’는 ‘나’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사랑이 잘 맞아떨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나를, 나는 다른 한 여자를 사랑했다. 맞아떨어진 것은 둘이 실연한 시기였다.
‘누군가가 얼마 전에 지독한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조차 싫었던 그 인간을 내 집에 데려와 술을 대접하고 같은 천장 아래 재울 수도 있다. 심지어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인간의 입술에 부디 슬픈 꿈일랑 꾸지 말라고 굿 나이트 키스까지 해줄 용의가 있다.’
‘실연의 유대감’에 대한 매끄러운 묘사를 열렬히 공감하다가, 엄마가 준 선물 보따리를 들고 큰고모님을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이르면 이게 뭔가, 싶다. ‘돈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도 실연의 유대에 속하는 것이었던가? 사랑을 잃고 슬픔을 앓기엔 좀 세속적인 이유가 아니었던가? 기묘하게 어긋나는 짜임새에, 작가는 특유의 유머감각을 발휘해 서사를 지연시킨다. 가령 선물을 두고 나와 그녀가 꿀인지 잼인지 추정하는 대화가 그렇다. 슬쩍 웃음이 나오는 이런 뜨악한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그 페이지에서 잠시 멈춰서 지나온 서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마치 우리가 인생의 요철에 툭 걸려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식이다.
이런 미끄러짐은 책에 실린 소설들의 주조를 이룬다. 표제작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오랜만에 대학 친구 현수를 만난 화자가 대학시절 공부모임의 선배 P형을 떠올리면서 회상하는 얘기다. “그 당시의 나는 젊기 때문에 차이를 못 견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차이를 과장하고 젊기 때문에 차이에 민감하다는 것을 몰랐다. 조사 하나, 어휘 하나에도 이고 살아야 할 하늘을 가르던 시절이었다.” 어느 젊음이 안 그랬을까. 화자는 그 젊음의 시절에 그가 P형과 사귄 것으로 알고 있다는 현수의 말을 듣는다. 그는 사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뭣했기에 딱 부러지게 답할 수 없다.
단편 ‘빈 찻잔 놓기’에서 영화감독 선배의 소개로 연출부의 남자 후배를 만나게 된 ‘그녀’는 후배와 호감이 오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둘이 만나는 줄 알고 나갔던 자리에 연출부의 다른 여자 후배가 합류하자, 그녀는 당혹해하면서 서둘러 혼자 감정을 정리한다. 이들 소설에서 인물들은 사랑을 키웠다가도 오해로, 무지로, 상처를 갖게 된다. 사랑의 행로에서 걸려 넘어지게 되는 이 이야기들은 그 순간 그들의 걸음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사랑뿐일까. 소설 속 그들과 함께 툭, 걸렸을 때 가만히 돌아보게 되는 우리 인생 전체가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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