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입니다. 가을입니다. 사색의 계절, 독서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연극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저는 공연관련 보도 자료가 오면 개막 일자부터 달력에 표시합니다. 8월에는 많아야 대여섯 편이었는데 지난주에는 열두 편으로 그 배가 넘었습니다. 뮤지컬도 있지만 대다수는 연극입니다. 한마디로 9월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연극의 봇물이 터지고 있는 셈입니다. 공연담당 기자로선 진땀나는 계절이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해 이 맘쯤으로 기억됩니다. 뮤지컬 '당신도 울고 있나요'라는 작품을 봤습니다. 이 작품은 공연이 끝난 뒤 주연을 맡은 김선경 씨가 객석의 관객 중 한 분을 모시고 인생살이의 힘겨운 사연을 듣는 즉석 토크쇼를 진행했는데 이게 참 재밌었습니다. 그날의 손님은 캐주얼한 옷에 운동화를 걸치고 마치 산책 나오듯 공연장을 찾은 50대 부부였습니다. 그때 무대 위로 나온 아내 분이 수줍게 들려준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0여 년간 한 집에서 모셔왔던 시부모가 돌아가신 뒤 남편이 고생한 아내를 위해 손을 잡고 일주일에 대학로 연극 한편씩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
그 두 분과 같은 부부를 위해 소개하고픈 연극이 있습니다. 대학로가 아니라 신촌에 있는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극단 맨씨어터의 '디너'입니다. 극단 맨씨어터는 우현주 정수영 정재은 3명의 여배우를 중심으로 30, 40대 기혼녀들의 애환과 고민을 담은 번안극 '썸걸즈'(2007)와 창작극 '울다가 웃으면'(2009) 등을 무대화했습니다. 국내 초연작인 이번 작품은 2000년 극작가 스티븐 마골리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연극의 번역극입니다.
'친구들과의 만찬(Dinner with Friends)'이 원제인 이 작품에는 두 쌍의 40대 부부가 등장합니다. 작가인 게이브(박정환)와 출판기획자인 카렌(우현주) 부부, 변호사 탐(김영필)과 화가 베스(정수영) 부부입니다. 게이브와 탐은 대학동창이고 카렌과 베스도 절친입니다. 연극에선 명시되지 않지만 이들은 백인 상류층이 모여 사는 코네티컷 주에서 이웃사촌으로 12년을 살면서 여름휴가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휴양지로 유명한 먀샤즈 바인야드 여름별장에서 함께 보내는 친구들입니다. 한마디로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잉꼬부부들입니다.
극은 그런 그들 부부사이의 균열에서 시작합니다. 이탈리아로 부부여행을 다녀온 게이브와 카렌 부부가 거기서 배워온 요리로 주말 만찬 파티를 연 어느 날 저녁 베스가 울음을 터뜨리며 폭탄발언을 합니다.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 그날 모임에 불참한 탐이 바람이 나서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게이브와 카렌 부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베스를 두둔하면서 탐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부부문제라는 것이 늘 그렇듯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들으면 다른 한쪽만 나쁜 사람이 되기 십상인 법. 그날 밤 눈보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한 탐이 야심한 시각 게이브네 집을 방문해 자신이야말로 피해자라고 토로하자 게이브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기 전에 게이브와 카렌의 소개로 만나자마자 첫눈에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톰과 베스의 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났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톰과 베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게이브와 카렌의 문제로 전이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따듯한 배려가 차가운 의무가 돼버리고, 뜨거웠던 잠자리가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 돼버리는 것이 게이브와 카렌 부부라고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탐은 그 순간 불륜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쪽에는 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애교만점 여자가 있고, 다른 한 쪽엔 나 자신을 똥만도 못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아내가 있어. 너라면 누굴 선택하겠냐?" 쉽게 답을 못하는 게이브에게 탐은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난 네가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다…내가 알게 된 이 '외로움'을 정말 몰랐으면 좋겠어."
탐의 이 말은 정반대로 게이브 속에 잠자고 있던 그 '외로움'을 일깨웁니다. 떠나가는 탐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에 비치는 게이브의 멍한 표정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 외로움이란 나방은 두개의 날개를 지녔습니다. 그 한쪽은 내가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열정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입니다. 결혼의 서약에 충실한 황톳길 위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탐이 선택한 신작로를 바라볼 때 생기는 현기증 같은 것이지요. 다른 한쪽은 너무도 친숙했던 그 무엇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도 낯설게 느껴질 때 엄습하는 섬뜩함입니다. 12년의 세월 희로애락을 같이 한 존재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상실감입니다.
베스의 편에만 섰던 카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카렌은 탐에게서 버림받은 베스를 위로하다가 베스 역시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황한 카렌은 "그래도 난 네가 좀 더 시간을 뒀으면 좋겠어"라는 충고로 이를 얼버무리려다 게이브와 똑같은 섬뜩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베스는 그런 카렌의 반응에 갑자기 날카로운 촉수를 들이밉니다. "왜 이래, 너한텐 별 볼일 없는 친구가 필요하잖아. 그래서 나한테 잘 해준 거 아니니. 주인공한텐 받쳐주는 조연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게이브와 카렌은 자신들 부부사랑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였던 탐과 베스를 잃게 됩니다. 탐과 베스가 다른 삶을 선택하는 순간 게이브와 카렌과의 우정과 추억도 버려야할 짐짝이 되고 맙니다.
연극은 젊었을 때 그 뜨거웠던 사랑의 동력이 다 떨어져버린 부부가 택하게 되는 양 갈래 길을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동력을 찾아서 다시 짜릿한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한 세월을 돛으로 삼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헤쳐 갈 것인가. 요즘의 대세는 전자 쪽인 것 같습니다만 연극은 후자의 편에 섭니다. 뉴욕에서 새 삶을 시작한 탐을 만나 그의 '멋진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게이브는 "난 사람이 사람다운 건, 다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는데 있다고 생각해"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젊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 마치 내 삶이 영원한 것처럼,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갖고, 어느 순간 우리도 아이들도 언젠가 생의 끝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거지, 그 다음엔 그 걱정뿐이야.… 그리고 꿈 많고 걱정 없던 시절, 흥청망청 흘려버린 그 시절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중년을 보내는 거야. 이제는 그걸 다시 찾고 싶어져, 왜냐면 이 모든 게 얼마나 무상한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야. 이제야 안다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너무 많은 것이 지나가 버렸다는 걸 깨닫는 건 부당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우린 현실적이지 않은 뭔가를 갈구하지. 누구는 가정을 버리기도 하고… 누구는 피아노를 배우기도 하면서. 난 피아노를 선택했어.… 우리는 서약을 했어, 결혼이 아니라 그런 삶에."
많은 현자들은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놓아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따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실제 삶을 통해 그 답을 구현해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답을 썼다가 잘못 썼다며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설사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것을 지우지 않고 끝까지 써내려갑니다. 니체는 그런 윤리적 결단을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연극의 마지막 카렌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거야"라면서 울먹입니다. 게이브는 "무슨 소리야. 아직 여자지"라며 카렌을 껴안습니다. 그럼에도 카렌이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자 게이브는 젊은 시절 카렌을 잠자리로 유혹하던 몸짓을 펼치며 말합니다. "미안해, 아가씨~ 남자라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사랑을 운명으로 삼는 게 아니라 운명을 사랑으로 삼을 줄 아는 것, 그게 진짜 남자가 아닐까요.
2만~3만5000 원.19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443-2327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