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내리쬐는 햇볕의 정적. 코끝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등 뒤로 조막만 해진 사륜구동 지프. 개펄 위로 우묵한 발자국만이 실끈처럼 이어졌다. 한참을 걸었지만 호수는 여전히 신기루처럼 멀리서 어른거렸다. 조심스러운 숨죽임. 얼마를 더 걸었을까. 문득 주황빛 물결이 아련하게 출렁거렸다. 다급히 꺼내든 카메라. 야릇하게 뻗은 목선과 다리가 렌즈에 잡혔다. 기약도 없이 돌아다닌 몇 시간, 비로소 수백 마리의 플라밍고(홍학)가 자태를 드러냈다. 한 해 30여만 마리가 찾아드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철새 도래지. 튀니지 이슈켈 국립공원의 속살을 드디어 마주한 순간이었다.》
○ “새 한 마리가 나를 부른다. 이 외로운 행성의 어딘가에서 또 만나자고” -최영미의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중에서
수도 튀니스에서 서북쪽으로 75km. 어둑한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이슈켈 공원은 오전 6시부터 한낮처럼 뜨거웠다. 하비브 가루아니 국립공원장도 언제나 이때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슈켈은 호수 면적만 8500ha가 넘습니다. 이슈켈 산(해발 511m)을 포함하면 전체 면적은 1만2600ha에 이르죠. 40도를 오르내리는 정오엔 야생동물도 잘 움직이질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둘러보려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해요.”
하지만 서둘러 따라나선 공원은 왠지 모를 적막감이 가득했다. 푸르다 못해 검은 빛깔마저 띠는 녹음. 산중턱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밋밋하기까지 했다. 구름 위로 아침거릴 찾는 잿빛 뿔매 한 마리만이 허공을 가로지를 뿐. 유네스코가 여길 왜 자연유산으로 지정했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겉모습만 보고 조바심을 내면 진면목을 놓치기 쉽습니다. 특히 여름철 먼 풍경은 정물화처럼 고즈넉하죠. 야생동물이 뛰노는 아프리카 초원을 기대했다면 잘못 온 겁니다. 인기척을 거부하는 베르베르 멧돼지와 황금자칼, 이집트 몽구스와 유럽 제넷고양이는 전문가도 쉽게 마주치기 힘들어요. 그보단 이슈켈의 독특한 환경을 잘 들여다보세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아프리카답지 않은 독특한 식물군락이 무성했다. 올리브나무와 물푸레나무, 심지어 침엽수종인 노송나무도 눈에 띈다. 호수를 둘러싼 개펄 지대엔 갈대밭도 빼곡하다. 여름엔 건조하고 겨울엔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비제르테 호수를 통해 바다와 이어진 이슈켈 호수의 염분은 습지에 자라나는 가래도 넉넉하게 일궈낸다.
바로 이런 풍성한 공원의 생태가 해마다 250종이 넘는 철새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새들에게 이슈켈은 넉넉한 먹이와 쉼터를 주는 경유지인 셈이다. 겨울이면 홍머리오리와 흰죽지, 회색기러기 등이 호수를 가득 채운다. 세계적인 멸종위기동물 흰머리루돌프오리도 여기선 볼 수 있다. 어렵사리 만났던 홍학은 이곳의 대표적 여름 명물이었다. ○ “나무들은 기나긴 세월을 말없이 고독했고, 그래서 더 영원히 젊은 원숙함을 드러냈다”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의 소설 ‘아르세니예프의 생’ 중에서
이슈켈은 현지 철새들에겐 생명수와 같은 존재다. 사실 새들에게 적합한 습기를 머금은 땅은 북아프리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인근 습원(濕原)은 일찌감치 인간의 손에 농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슈켈은 13세기부터 왕가 소유 수렵지였고, 18세기부터 1950년대까진 후사인 왕조의 사유지로 보호받았다. 근대국가가 성립한 뒤 곧 198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같은 해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돼 큰 피해를 비켜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슈켈에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이 지역은 가뭄이 몇 년째 이어졌다. 게다가 튀니지 정부는 식수 확보와 수위 조절을 위해 호수로 흘러드는 강들에 댐과 수문을 세웠다. 일대가 건조해지자 가래를 비롯한 습지식물이 줄어들었고, 이는 철새 먹이를 부족하게 만들었다. 결국 1996년 이곳은 ‘위기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까지 올랐다. 이슈켈에 상주하는 엘루미 마리 호세 국립환경연구소장은 그때만 떠올리면 울적해진다.
“공원을 찾는 철새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심했을 때는 한 해 3만∼4만 마리밖에 오질 않았어요. 호수의 물이 부족해지자 염분 함유량이 올라가면서 생태환경 자체가 변질된 거죠. 정부와 유네스코가 지극정성을 쏟지 않았다면 북아프리카의 유일한 철새 도래지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후반부터 이슈켈은 엄격한 관리체제로 바뀐다. 종종 있었던 밀렵은 일절 금지됐고, 산에서 캐던 품질 좋은 석회암과 대리석 채굴도 중단됐다. 무엇보다 습지식물의 보존을 위해 염분 함유량 보존에 각별하게 신경 썼다. 겨울엔 L당 평균 10g, 여름엔 평균 35g 수준에서 맞춰져야 적당하다. 호수 곳곳에 염분측정기를 설치해 수시로 점검했다. 2006년 오랜 노력이 열매를 맺어 위기 리스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메드 반아브달라 유네스코 수석연구원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위기 리스트에서 빠졌다고 위험이 사라졌단 뜻은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가뭄이 들어서 올해 상황이 무척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이 때문에 정부와 함께 몇 달마다 정기적으로 정밀탐사에 나섭니다. 다행히 현재로선 긍정적인 안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슈켈이 영원히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진정한 생명의 정치란 모든 생명체와 사람에게 그들의 자리를 되돌려주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자연이 경제다’ 중에서
바로 이 대목은 이슈켈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이 공원은 다른 자연보호지역과 달리 공원 내에서 주민이 생활한다. 현재 정부에서 허가받은 100가구 정도가 삶을 꾸리고 있다. 공원 주위로 경작지를 일구고, 호수와 인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얼핏 자연을 침해할까 염려도 들지만 호세 소장은 생각이 달랐다.
“실제 이곳은 석기시대부터 산기슭 등지에서 사람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오랫동안 공존했단 뜻이죠. 억지로 내쫓기보단 그 속에서 자연스레 어울리는 게 더 맞다고 봅니다. 유네스코 역시 그 점에 동의했고요.”
하지만 이 공존이 과연 성공적으로 지속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공원 바깥에선 갈수록 개간지가 늘고 인구도 증가하고 있다. 공원 내외 농민들이 자연보호를 제대로 준수하는지도 확실치 않다. 가루아니 공원장 역시 “적극적으로 홍보 및 단속을 벌이곤 있지만 일부 외부 농민이 맘대로 공원에 들어와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없지 않다”며 걱정했다.
방문취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공원장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며 채근했다. 갈대밭을 헤집고 한참을 들어갔을까. 농토 주위로 자그마한 연못에 당도했다. 그곳엔 이슈켈이 자랑하는 야생 아프리카물소 10여 마리가 한가로이 멱을 감고 있었다. 오래도록 사람의 기척에 익숙해진 몸짓. 몇 발짝 다가가도 슬쩍 쳐다볼 뿐 굳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한때 멸종위기에 처했던 동물이라기엔 너무나 느긋하다. 이 고즈넉한 평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문득 뒤뚱거리는 새끼물소에게 ‘공존’의 뜻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어리석은 인간의 넋두리처럼.
글 · 사진 이슈켈(튀니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위험에 처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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