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해발 793m) 자락은 온유하다. 봉우리는 암소 잔등처럼 아늑하다. 모악산은 동쪽 전주와 서쪽 김제 사이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김제 너머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눈길이 그윽하다. 김제 사람들은 모악산의 너른 앞가슴을 보며 산다. 모악산 뒤쪽엔 전주(12km)가 있다. 전주 사람들은 모악산의 너른 등판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모악산은 발밑에 김제만경 들판을 키운다. 만경강(80.86km) 동진강(44.7km)이 바로 그 생명의 젖줄이다. 두 강물은 갈지자로 느릿느릿 호남평야를 고루 적시며 서해바다로 빠진다. 호남평야는 동서 50km, 남북 80km의 타원형이다. 붉게 물든 저물녘, 들판은 강물과 두런거리며 어둠을 맞는다. 농부들은 저마다 저문 강에 삽과 손발을 씻고 집으로 돌아간다.
김제만경 들판은 그렇게 수천수만 년 동안 모악산의 품에서 자랐다. 평평한 호남평야 들머리에 갑자기 우뚝 솟은 산. 발아래엔 모두 ‘쇠 금(金)’자로 시작되는 마을들을 거느리고 있다. 금평(金坪) 금산(金山) 금구(金溝) 김제(金堤)…. 우리말로 금들 금뫼 금도랑 금언덕…. 그렇다. 모악산 골짜기에는 물이 많다. 수생금(水生金). 물은 금을 낳는다. 생명을 키운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호남평야를 목 축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이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거르면 사금이 쏟아졌다. 한때 겨울만 되면 산자락 논밭마다 사금 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굴착기로 땅 밑 깊숙이 논밭을 갈아엎은 뒤, 그 모래흙을 체로 거르면 사금이 나왔다. 지금은 겨울이 돼도 사금 채취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김제 사람들은 말한다.
“원래 모악산 자락 밑에 사람 형상의 커다란 금덩이가 묻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머리와 팔다리 그리고 몸통 일부까지 다 캐 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몸통의 극히 일부뿐이다. 그것도 아주 땅 깊숙이 묻혀 있다.”
모악산 한가운데 혈자리가 바로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금산사미륵전은 연꽃 모양 배의 중심인 수술 부분에 있다. 봉우리들은 모두 연꽃잎 모양이다. 배는 막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를 향해 항구를 떠나려 하고 있다. 김제금산 쪽이 배 앞머리 쪽이고, 완주구이 쪽이 배 꼬리 부분이다. 오리알터(금평저수지)의 제비산(帝妃山)이 바로 돛대에 해당한다.
그렇다. 모악산은 바로 미륵의 나라이다. 미륵전은 미륵신앙의 성지다. 주위의 미륵 관련 신흥종교들의 중심이 바로 미륵전이다. 하지만 불교 조계종 시각에서 보면 그건 부처님의 도량이다. 스님들은 미륵교도들을 미신이나 사교신자로 보는 반면에 미륵교도들은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할 때 미륵을 모셨으니, 금산사 스님들도 당연히 그 뜻에 따라 미륵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륵부처는 앞으로 올 미래불이다. 메시아다. 도솔천에서 살고 있는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오면 용화세계가 된다. 용화세계는 이상향인 샹그릴라이다. 모악산 앞자락 반경 30리(12km)엔 미륵신앙공동체가 많다. 미륵 품 안에서 살면 큰 난리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백운동마을 동곡마을 용화동마을 청도리….
미륵길(약 5km)은 김제 청도리 귀신사(歸信寺)에서 시작한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절집.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숨은 꽃’은 1992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귀신사는 화장 안한 말간 절집이다. 대웅전 단청이 ‘생얼’ 그대로이다. 뒤란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탑전을 지키고 있다. 그 옆엔 석수상이 있고, 석수 등 위엔 남근석이 빳빳이 서있다. 탑전 오르는 돌계단에 앉아 모악산을 바라보면 백운동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보인다. 돌계단 양 길섶엔 야생차가 성성하다.
백운동마을은 강증산의 제자 안내성(安乃成·1867∼1949)이 1929년 세운 증산대도교 교인촌이다. 안내성의 아들 안문환과 제자 유영주(柳永柱)의 후손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 한때 수백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20여 가구가 뽕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요즘도 강증산의 생일 등엔 위쪽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치성을 드린다. 증산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마을에 발붙일 수 없다.
백운동 뽕밭은 초기 정착할 때 심은 것으로 80년이 넘은 재래종이다. 당시엔 누에를 키웠지만 요즘엔 노인이 많아 오디 따는 것만도 힘에 부친다. 백운동 재래 뽕나무 오디즙은 인근에 이름났다. 백운동은 뽕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늙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다. 마을 고샅길은 커다란 뽕잎 사이로 덮여있다. 할머니들이 간이정자에 앉아 시간을 삭이고 있다. 한낮인데도 풀벌레 소리만 고즈넉하다. 백운동길은 도통사(道通寺)로 이어진다. 도통사도 증산교 계열이다. 그 아래엔 용화교본사가 숨어있다. 도통은 증산교에서 깨달음을 말한다. 현재 도통사는 99세의 강성통(姜聖通)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다. 이름 자체가 이미 도통했다. 허리가 꼿꼿하고 눈이 형형하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그는 말한다.
“미륵부처가 오실 날이 며칠 안 남았다. 후천개벽의 세상이 오면, 33경의 사바세계는 끝이 난다. 석가모니부처의 운이 다했다.”
도통사를 지나 용화삼거리로 가는 길은 아늑한 오솔길이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길이다. 산허리를 밟아 내려가다 보면 금세 금산교회를 지나 오리알터가 나온다. 금산교회는 1908년 지은 ㄱ자형 한옥건물. 남녀유별이 있었던 시대 남쪽이 남자석이고, 동쪽이 여자석이었다. 상량문엔 남자석은 한자로, 여자석은 한글로 성경 구절이 씌어있다. 인근엔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촬영했던 수류성당도 있다. 수류성당은 6·25전쟁 때 신자 50여 명이 순교한 곳. 100년이 훨씬 넘은 유서 깊은 성당이다.
증산(甑山)의 ‘증(甑)’자는 ‘시루’를 뜻한다. 증산은 곧 시루봉이다. 음식을 삶으면 국물이 우러나 맛이 달라진다. 하지만 시루에 찌면 제 맛을 잃지 않는다. 오리알터 주변에 살았던 정여립이나 전봉준 강증산 모두 백성과 더불어 사는 꿈을 꿨다. 그들은 늘 민초들과 울고 웃었다. 그러다가 백성들의 뜻에 따라 결연히 일어났다. ‘완산칠봉 바라볼 때마다/전주성 밀고 들어가던/농군(農軍)들의 함성들이/땅을 울리며/가슴 한복판으로/달려왔었는데/금년 세모의 완산칠봉에는/‘전주화약(全州和約)’ 믿고/뿔뿔이 돌아가는/농꾼들의 여물지 못한/뒷모습 보입니다./곰나루, 우금치의/처절한 패배도 보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다시 봅니다./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해는 내일 또다시 떠오른다는/믿음직한 진리를/우리는 다시 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2일 여행가 김남희-신정일 씨와 걷기 행사▼
모악산 둘레길이 올해 말까지 열린다. 모악산 주위의 전북 전주시 김제시 완주군 3개 시군은 ‘모악산 마실길’을 연내에 개통하기로 하고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총거리는 56km로 각각 김제 25km, 완주 20km, 전주 11km이다. 김제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 동학, 원불교, 증산교 등이 어우러진 금산사 자락과 김제들판을 가로지르며 완주는 모악산 뒷자락 숲길, 전주는 마을 고샅길을 지난다.
걷기전문단체인 사단법인 마실길은 1일 오후 2시 전북도청 중회의실(3층)에서 모악산 마실길 세미나를 하고 2일 걷기행사를 갖는다. 세미나엔 지구촌 도보여행가 김남희 씨와 현대판 고산자 신정일 씨가 연사로 나선다. 2일 걷기행사는 김제 청도리 귀신사를 출발해 구릿골 약방에 도착하는 미륵길(약 5km) 코스에서 열린다.
▼‘오리알 터’는 ‘올(來)터’서 유래… 구원자가 나타날 장소임을 암시▼
모악산 배꼽 바로 밑엔 ‘오리알 터’로 불리는 금평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오리알 터’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올(來) 터’라는 뜻이다. ‘올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리터→오리알터’가 됐다. ‘천하우주의 모든 기운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이다.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메시아가 오는 터란 것이다. 불교에서라면 미륵불이 오고, 증산교에서라면 상제(上帝) 강증산이 오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모악산 주변의 신흥종교인들에게 ‘우주의 자궁’인 셈이다. 모든 생명의 고향인 것이다.
타원형의 오리알터 위쪽 정수리에 솟은 산이 바로 제비산(帝妃山)이다. ‘황제의 아내 산’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혁명아 정여립(1546∼1589)은 서른아홉 살 때 한양의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반상의 귀천과 사농공상의 차별, 남녀차별이 전혀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대동계엔 사당패 광대 점쟁이 풍수 무당 등 별의별 인물들이 다 있었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집터와 그가 천일 동안 기도를 했다는 치마바위가 남아있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은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감수성 많은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훗날 그의 오른팔이 됐던 동학의 금구접주 김덕명과 태인접주 손화중도 바로 그 시절에 사귄 동무들이었다. 전봉준은 그곳에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요즘에도 이곳에선 ‘눈이 샛별같이 빛나는 차돌 같은 소년 녹두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강증산(1871∼1909)은 정여립 집터 바로 옆 구릿골(동곡마을)에 약방(광제국·廣濟局)을 차려놓고 구한말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는 여성과 백정 무당이 존경받고 서자와 상민이 무시당하지 않는 후천개벽의 세상을 역설했다. 그는 그곳에서 서른여덟에 눈을 감았지만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강증산은 막걸리도 곧잘 마시고, 신이 나면 얼씨구절씨구 어깨춤도 들썩였다. 꽹과리나 장구는 물론 굿도 잘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광대요 무당이며 천지농사꾼이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가장 큰 후천개벽의 전위다.”
오리알 터 주변엔 증산계열 종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의 유일한 혈육인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 제자 안내성의 증산대도회(백운동 교인촌), 제자 이상호·이정립 형제의 증산교본부, 제자 김형렬의 미륵불교, 제자 서백일의 용화교본부, 증산 외손자가 세운 전각 청도대향원, 증산의 둘째 부인 고수부(태을교)를 모신 집, 도통사…. 20여 개 종파가 남아있지만 대부분 노인들이 지키고 있다. 6·25전쟁 후 50여 종파에 수천여 신도에 이르렀던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증산의 시신은 본부인 정 씨가 제자 차경석(보천교)에게 ‘증산유골반환소송’ 끝에 승소(동아일보 1929년 3월 27일자 보도), 현재 딸이 세운 증산법종교 경내에 묻혀 있다. 증산의 구릿골 약방은 최근까지도 소박한 초가집이었으나 증산교의 한 종파가 인수해 거대한 기와집으로 바꿔놓았다. 마당가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꽃밭도 사라지고 뒤란의 텃밭도 없어졌다. ▽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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