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에 120번 떨어진 배우 지망생이 있다. '잘 될까' 싶을 정도로 연기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소속사는 그를 내치지 못했다. 눈빛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뭔가를 끈질기게 배우고 있었다. 대본을 구하면 자양강장제를 한 박스 사 들고 연기 선생을 찾아가 한 박스를 다 마실 때까지 계속 한 자리에서 캐릭터를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다음날 새벽 5~6시까지 연기 선생을 붙들고 레슨을 청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선생은 과로로 혈변을 2번이나 쏟았다. 그는 바로 KBS '추노'로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한류스타 남자연기상 받은 배우 장혁이다.》
'스타들의 연기 선생님'으로 불리며 14년간 80여 명의 톱스타를 배출한 안혁모 iHQ 연기 아카데미 본부장(41)이 최근 '꿈을 여는 12가지 열쇠'(W BOOK 에이전시)를 펴냈다. 박시후(32), 김선아(35), 전지현(29), 성유리(29), 장혁(34), 조인성(29), 선우선(35), 최시원(23), 박민영(24), 지진희(39) 등 11명의 스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흘린 땀에 관한 얘기다.
9월 29일 만난 안 본부장은 "이런 스타들이 가십으로만 소모되고, 오징어 다리처럼 씹히는 게 안타까워서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느림보 거북이' 같은 배우 장혁
장혁은 그의 '첫 제자'이다. 이날도 장혁이 책을 받으러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선생님'의 얼굴을 보러온 것이다.
1997년 경기도립극단에 소속 연기자로 대학 입시 연기 지도를 하던 그에게 정훈탁 iHQ 대표(43)가 연락을 해왔다. "우리에게 이러이러한 신인이 있는데 가르쳐달라." 그렇게 장혁과 전지현을 맡았다. 프로 연기자는 처음이었다.
"장혁이란 배우는 참 느렸어요. 거북이 같아요. 처음에는 어눌하고 표현이 거칠고 답답했어요. 그런데 쉬지 않고 늘 고민해요. 그게 대단한 거예요. 6개월도 하기 어렵다는 절권도를 10년 동안 한 근성 있는 사람입니다. 배우가 무식해 보이면 안 된다며 한 주에 책 한권 이상을 읽고, 작품에 들어가서도 잠잘 시간을 쪼개 한 달에 책 한권 이상을 읽어요. 보통 아기들이 엄마 하기 전까지 2000번 옹알이를 해요. 계속 듣고 엄마 입을 만져보잖아요. 걷기까지는 1000번을 시도해요. 장혁이라는 배우는 어느 순간도 안 지쳐요. 한결같은 사람, 365일 영업하는 마트 같아요. 쉬는 건 없어요. 그냥 해요 노력을. 늘 손에 활자가 들려져 있어요. 이 땅의 청소년들이 조금 하다가 지치는 게 답답해요. 이런 끈기를 전해주고 싶은 거예요."
장혁은 2004년 송승헌, 한재석과 함께 병역비리에 연루돼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입대했다. 2006년 제대 후 숨고르기를 하다가 2007년 MBC '고맙습니다'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에이즈에 걸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공효진 분)와 사랑에 빠지는 변호사 역할로 잔잔한 감동을 줬다.
-장혁 씨가 '고맙습니다'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 어떤 연기 준비를 했나요?
"발음 클리닉을 했어요. 턱을 풀어주고 음성을 좋게 만드는 그런 트레이닝이 있어요. 같이 대본을 읽고 인물 콘셉트를 잡고 들어가죠. 혁이가 얘기하면 저는 듣고만 있다가 '그거 좋겠다'라고 확신을 주는 일을 해요. 정 이상한 거 있으면 슬쩍 의견을 던지죠. 14년 동안 신경전을 무지하게 벌여서 서로 너무 잘 아니까. 저는 혁이 때문에 '피똥'을 2번 쌌어요."
-선생님이 고생한 얘기를 장혁 씨도 아나요?
"'죄송해요'라고 하고 또 똑같이 해요. 그러다가 자기가 아이 둘 둔 아빠가 되니까 '선생님, 선생님이 딱 저 같은 때였는데 죽을 짓을 했습니다. 그때 엄청난 짓을 했군요'라고 하더라고요. '너도 딱 너 같은 후배 만나서 겪어봐라'라고 농담 삼아 얘길 했지만 그만큼 열정을 가진 친구가 없어요. 공짜로 된 게 아니에요."
▶'욕심쟁이' 박시후, '질문광' 전지현
-장혁 씨 외에 가장 인상 깊었던 제자는 누구인가요?
"박시후. 이 친구도 참 황당해요. 진땀나요. 엄마에게 '왜 밥 안 줘!'하는 것처럼 '선생님 내 대본 봤어요? 어제 드라마 봤어요?'라고 당당하게 평가를 들려달라고 해요. 밤늦은 시간에도 연기 연습을 하겠다며 집으로 찾아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친구는 밉지가 않아요. 마음을 열게 하는 느낌이 있어요."
-또 다른 첫 제자 전지현 씨는요?
"인상적이에요. 항상 질문을 달고 살아요. '이런 게 아닐까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호기심을 갖고 저를 봐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해요. 캐릭터를 여러 방향에서 봐서 평면도가 아닌 3D로 만들어내죠. 굉장히 스마트한 배우입니다. 한국에서도 내년 초 새 작품에 들어가요. 잘 해낼 거예요."
-연기를 가르치면서 가장 기뻤던 때는 언제인가요?
"김선아가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로 연기대상 수상하면서 '안혁모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소감을 말했을 때 감동의 눈물을 흘렸어요. '감사합니다' 한 마디면 저는 녹아요. 사람이 조금 떴다고 목에 힘주면 '아 알았어. 귀하신 분 귀하게 생활 하세요' 하고 저도 무시하게 되죠. 십여 년 가르치면서 두 명 정도가 그런 모습을 보였어요. 인간의 도리를 아는 배우를 만나면 자존심 올려주고, 마음껏 하게 해주죠."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고 하니까 스타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1차 원고가 나왔을 때 메일로 보냈어요. '감동적이에요. 감사해요. 좋은 말만 써준 것 아니에요?'라는 답장이 왔어요. 지현이는 '선생님 너무 장점만 쓴 것 같아요. 단점도 써줘야죠'라고 하고 조인성이 '선생님 저는 욕을 써줘도 돼요'라고 하기에, 내 눈에는 단점은 안 보인다고 했어요. 최시원 빼고는 다 5년 이상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에요."
▶경기도립극단에 몸담으면서 시작한 연극 교육자의 길
-책을 보면 경기도립극단에 있으면서 소외층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쳤다는 대목이 있어요.
"손학규 전 지사의 '찾아가는 교육 서비스' 시스템이었어요. 경기도에는 학생 수가 100명에서 150명 미만의 학교들이 있어요. 교육적인 혜택을 못 받는 친구들이 많죠. 경기도 교육청과 문화의 전당에서 레슨비를 반씩 내서 문화 예술 교사를 보내요. 가 보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좋은 집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패가 갈려 있어요. 수업하러 갔는데 교실 뒤 돌난간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가 있었어요. 수업을 안 듣는 척 하다가 난간에서 내려와 상처 입은 고양이 강아지처럼 구석에 웅크려 앉았어요. 모두에게 '뒤돌아서 수업하자'고 하고 맨 뒤로 가서 한 시간 동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수업을 했어요. 그렇게 4년 후 그 아이가 얼마나 밝아졌는지 몰라요. 또 다른 아이는 다음 사이트 신인 작가 발굴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어요."
-연극의 교육적 효과가 상당합니다.
"연기랑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행복했어요. 저도 애가 있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쓴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지 못해도 책은 가끔 읽어줬어요. 소리 내서 실감나게 의성어 의태어를 마구 살려서 자극해주고 때로는 '으앙' 호랑이 소리를 내면서 배를 꽉 물기도 해요. 그러면 아이들은 제 흉내를 내면서 떠듬떠듬 읽어요. 이야기꾼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연극 기반 프레젠테이션 교육의 원리이기도 해요."
-연기를 배운다고 하면 비용에 대한 부담부터 떠오릅니다.
"맞아요. 미술, 음악 교육보다 비싸요. 2000년에 6~7학과인 연극영화 관련 학과가 지금 200개가 넘어가면서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학부모 상담 때 이런 얘기를 꼭 해요. '보여 지는 것들은 빙산의 일각보다 더 작습니다. 이게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이 아이가 연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데 돈도 잘 못 받습니다. 직장에 다니면 월급 나오잖아요? 얘들은 일해야 돈을 법니다. 일을 못하면 그냥 굶고 삽니다. 미술 음악보다 너무너무 힘들고, 뜨기 전까진 밥 벌어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꽃미남 꽃미녀만 밥 먹는 시대가 아니죠. 조연들도 연기만 잘하면 4~5 작품하면서 돈을 더 많이 받아요. 나쁘지 않아요. 잘만 되면 부도 누릴 수 있고 연기자로서의 만족도 얻을 수 있고 예술가로서 자존심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직업인데 그 경지까지 이르기 위해선 참아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아요.' 그러면 엄마들이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가 와요. 사실 오래 할 것도 없이 끼가 있는 애들은 1~3개월이면 나와요. 그게 근성이거든요."
▶'네비게이션'처럼 목표를 입력하고 전진하라
-연기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요리사가 되려면 많이 먹어봐야 하듯.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연기를 자주 봐야 해요. TV대본을 구하거나, 받아써서 한번 똑같이 따라 해 보는 거예요. 동영상도 캠코더 좋은 것도 가격이 떨어졌으니까 찍어 보고요. 내가 나를 찍어서 보게 되면 예뻐져요. 그 이상을 배우고 싶다고 할 때 이런 곳을 찾아오면 경제적인 부담을 줄일 수 있어요. 그렇게 하다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 멈춰야 하는 거고. 그래서 뭔가 더 확인을 받고 오디션을 보면 길이 열리는 거예요. 꼭 투자가 돈 투자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돈은 문제가 아니에요. TV만 봐도 거울만 봐도 앞에 누구 한 사람만 있어도 가능합니다."
-끝으로 연기자 지망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단순히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내가 어떤 연기자가 될지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그림을 그려본 다음에 뛰어들었으면 좋겠어요.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뛰어드는 친구들이 있어요. 얼굴 예쁜 것도 큰 무기예요. 그러나 예뻐서 다른 걸 못하면 안 되거든요. 그렇다고 얼굴 못생겼다고 포기하면 안 되지만요. 내비게이션 원리라는 게 있어요. 목적지를 입력하면 길을 잘못 들어도 계속 얘기해 주잖아요?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바로 목표에요. 일이 잘 안되면 '이유가 뭐지?'라고 하고 다시 두들겨 보고, 되짚고, 다시 세팅하는 거죠. 목표가 없으면 내비게이션도 아무 소리 안 해요."
안 본부장은 연기 지도자들을 위한 강의 커리큘럼을 만들고 있다. 앞으로 이들을 영어와 연기를 접목한 아동 교육프로그램, 직장인 대상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에 투입할 계획이다.
"많은 연극영화과 전공생들이 배우 데뷔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당장 돈을 벌 수 있는데 하지를 않으려 해요. 가르치는 것도 맛이 있는데, 그걸 몰라요."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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