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Q: 씨없고 줄기로 번식… 대량생산 과정 수천명 학살… 끊임없이 병에 시달리는 과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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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일 03시 00분


인류에 축복과 재앙 안긴 ‘노란 식량’
◇바나나/댄 쾨펠 지음·김세진 옮김/356쪽·1만5000원/이마고

나무처럼 생겼지만 실은 풀이다. 이 과일을 기르는 최초의 농장은 7000여 년 전에 생겼다. 지금은 전 세계에 농장이 퍼져 있다. 이 과일 덕분에 대규모 공장식 농업 기술이 발달했고, 바다를 건너 과일을 운송하는 다국적 과일산업이 비롯됐다. 한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또다시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수십 년 이내로 이 과일을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연상시키는 노란색의 길쭉한 과일, 바로 바나나다. 자연과 생태를 아우르며 다양한 주제의 글을 발표해온 저자는 바나나를 따라 역사와 경제, 정치, 과학의 영역을 넘나든다.

바나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어디에 나올까? 저자는 성경이라고 답한다. 흔히 사람들이 사과라고 생각하는 선악과가 실은 바나나라는 추측이다. 고대 성경에는 선악과가 사과라고 명시하는 구절이 없고,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코란에서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를 부르는 고대 아랍어 ‘탈’은 바나나 나무로 번역되고, 이 나무는 “길게 드리운 그늘 아래 열매가 층층이 쌓인다”고 묘사된다. 바나나의 외관과 일치한다.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던 바나나는 7세기 중엽 아프리카로 넘어갔고 다시 유럽으로 전파됐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 과일을 손가락을 뜻하는 아랍어 ‘바난’을 따서 바나나라 부르기 시작했다.

인류가 가장 빨리 농사짓기 시작한 작물 중 하나이자 세계인이 먹는 과일, 바나나. 누군가에게는 간편한 아침식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좌우하는 식량이다. 저자는 바나나에 얽힌 인간의 역사를 풀어내고 그 미래까지 전망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인류가 가장 빨리 농사짓기 시작한 작물 중 하나이자 세계인이 먹는 과일, 바나나. 누군가에게는 간편한 아침식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좌우하는 식량이다. 저자는 바나나에 얽힌 인간의 역사를 풀어내고 그 미래까지 전망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세기 후반 미국에 전파된 바나나는 세계화를 잉태했다. 바다를 건너 해외 농산물을 수출, 수입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바나나 회사 보스턴 프루트는 금세 물러지고 썩는 바나나를 운송하기 위해 냉장유통 체계를 개발했다. 훗날 유나이티드 프루트로 변신해 대표적인 바나나 브랜드 ‘치키타’를 만들어낸 회사다. 중남미에서 수확된 바나나는 얼음이 가득 든 배를 타고 뉴올리언스 항에 내린 뒤 미국 전역의 냉장보관창고로 이송됐다. 수천 개의 얼음덩어리를 사용하는 냉각 방식 때문에 뉴올리언스의 수입상 바카로는 멕시코 만 일대의 얼음공장을 모두 사들이기도 했다. 바카로가 세운 바나나 회사 이름이 스탠더드 프루트, 바로 지금의 돌(Dole)이다. 1900년 1500만 송이였던 미국 내 바나나 소비량은 1910년 4000만 송이로 늘어났다.

바나나 회사의 출현은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나나 회사는 싼값에 바나나를 생산해 내기 위해 중남미의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회사는 각 나라의 정권과 유착했다. 바나나에 쓰는 농약 ‘보르도액’에 중독된 노동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세계화의 어두운 뒷면이다.

“12시가 되자 3000명이 넘는 주민과 노동자, 여자와 아이들이 역전 광장으로 몰려나와 인근 거리를 가득 메웠고, 그들의 앞을 줄지어 늘어선 기관총이 가로막았다…14정의 기관총이 동시에 대답했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생생히 묘사한 이 장면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29년에 일어난 콜롬비아 바나나 대학살이다. 1920년대 초부터 정당한 보수와 작업환경을 요구하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28년 10월 노동자 3만2000명이 파업에 나섰다. 바나나 회사는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12월 5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다음 날 시에네가 도시 광장에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바나나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5분 안에 구역을 깨끗이 비우라는 명령을 받은 콜롬비아 군인들은 기관총 4정으로 무차별 사격을 했다. 이날 미국 대사는 “(군인들이)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이후 콜롬비아에는 지금까지도 불법 조직이 활개를 치고 게릴라전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콜롬비아와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바나나 기업이 개입한 결과 빚어진 불안정성이 제도적 취약성이라는 전통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대학살 당시 바나나 회사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바나나병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파나마병이었다. 바나나는 무성(無性)인 데다 씨도 없다. 그 대신 땅에 묻힌 구근처럼 생긴 알줄기에서 가지 모양의 기관이 자라나고 여기서 다시 알줄기가 생기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바나나는 한 조상에서 나온 셈이다. 종이 다르더라도 유전자는 거의 일치한다.

이 결과 바나나는 질병에 굉장히 취약해졌다. 거대한 농장에서 한 작물만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특성상 흙을 통해 전파되는 파나마병은 급속하게 전염됐다. 한번 흙이 오염되면 그 농장을 떠나 다른 곳에 농장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시 주로 재배되던 그로미셸종은 1965년 공식적으로 재배가 중단된다. 그 뒤를 이어 파나마병을 이겨낸 바나나가 지금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종이다.

그러나 캐번디시종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 1980년대 말 변종 파나마병이 아시아 지역에서 창궐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토종 바나나는 이 변종 파나마병에 내성이 있지만 외국에서 건너온 캐번디시종은 변종 파나마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 병은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바나나가 단순한 과일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주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세계인의 바나나 캐번디시에 퍼진 전염병은 수십 종의 주식용 바나나에도, 그 병을 이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생물다양성을 지닌 수백 종의 바나나에도 퍼질 수 있다”고 염려한다. 과연 바나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명쾌한 답을 내리는 대신 유전공학, 전통적 식물 육종법을 통한 새로운 바나나 종 개발, 유기농 농법 등 다양한 대안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상세히 소개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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