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의 향기]세종 ‘재상중심’ - 영조 ‘서민군주’ - 정조 ‘사회통합’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2일 03시 00분


◇조선의 통치철학/백승종 박현모 한명기 신병주 허동현 지음/404쪽·1만9500원/푸른역사

5명의 역사학자가 쓴 이 책은 “우리의 역사에는 주목할 만한 통치철학이 존재해 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통치철학의 빈곤에 시달리는 오늘날,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만한 통치철학을 멀리 외국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우리 역사에서 찾으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실장은 정도전과 세종의 통치철학을 ‘민본’과 ‘재상중심’이라는 키워드로 소개했다. 분석에 따르면 정도전과 세종의 통치이념은 실천 성리학의 입장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했다.

세종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을 국가경영의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고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져서 각기 생생하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국왕 본연의 임무로 여겼다. 정도전 역시 “민심을 얻으면 백성이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백성은 군주를 버린다”는 말로 민본을 강조했다.

세종은 정치의 기원으로 일종의 ‘국왕추대론’을 말했다. ‘백성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는 뜻이다. 박 실장은 “이런 국왕추대론은 서양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작용한 사회계약론을 연상시킨다”고 해석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정도전과 세종은 재상중심체제를 이상적인 통치체제로 간주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재상에게 일을 전부 맡기는’ 의정부사서제를 확립했다.

16세기 조선 사회에는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이가 조광조다. 그는 ‘요순시대’를 현세에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통치철학은 1515년 증광문과시험 때 제출한 답안지에 잘 나타나 있다.

“전하께서는 성실하게 도(道)를 밝히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 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군왕이 명도(明道)와 근독(謹獨) 두 가지만 실행에 옮기면 수년 내로 요순시대의 도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조광조의 몰락 이후 성리학적 이상정치론이 실종되고 한동안 속물정치가 조정을 지배했다. 이에 김인후가 조광조의 복권운동을 주창했다. 그는 조광조의 복권이 시급한 이유를 ‘도덕성의 회복’에서 찾았다. 조광조를 비롯해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넋을 위로해 주지 못할 경우 세상은 더욱 타락하고 이상사회를 꿈꾸는 성리학 본연의 도덕적 동력이 상실되고 만다는 주장이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바탕을 이룬 영조와 정조의 통치철학을 짚었다. 1728년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있자 영조는 반란의 원인에 대해 “조정에서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지적했다. 탕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영조는 또 ‘서민군주’를 표방하면서 사치 방지를 최고 국정 철학의 하나로 삼았다.

정조의 통치철학에선 정치, 사회적 통합 의지가 주목할 만하다고 신 교수는 강조한다. 우선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정치권에 다양한 정치세력을 포진시켰다. 정조는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일방적 독주를 막았고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직접 정책에 활용했다. 각 지역의 인재를 두루 선발한 정조는 크게 부상하지 못했던 호남 지역 끌어안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신 교수는 “영조와 정조는 제왕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통치철학 외에 시대 상황에 맞는 정치 능력을 겸비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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