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의 현장에서 발표된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김준태 시인 작)’는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쳤다. 그것은 1980년 5월의 공포 속에서 태어난 희망의 시였다. 시는 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형식이다. 어째서 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거나 무효일 때의 극한에서 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시작하는지 모른다. 1980년 5월 광주는 진공이었다. 그 처절한 상황이 종료된 뒤 잔인한 적막 속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나와야 했다. 그 치열한 상황들이 일거에 쓰러져버린 그 삶의 영점에서 다시 삶의 첫 의지를 일으켜야 했다.
이런 현실 앞에서 1995년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제단에 하나의 미적 세계를 헌정하는 취지로 창설되었다. 광주비엔날레가 해를 거듭하는 동안 독자적 창의를 과시해 온 공헌은 광주의 피가 외치고 있음직한 ‘민주주의는 아름답다’는 정치미학까지도 아우르는 충정과 함께 한층 의미심장하다.
광주항쟁 30년을 맞아 열린 비엔날레의 주제 ‘만인보’는 항쟁 희생자의 30주기와 항쟁 계승자의 30주년을 함께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5년은 내게 만인보 30권의 시작이었다. 아니 만인보의 태생은 곧 광주항쟁의 태생과 똑같이 30년의 시간 저쪽에 있다. 공교롭게도 5·18과 관련된 내란음모죄와 계엄법 위반 등의 국사범이 된 내가 1980년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광주항쟁을 어렴풋이 듣게 되었고, 그런 상황을 견디어내는 구상으로 ‘만인보’가 태어난 것이다. 만인보 완간과 함께 만인보 안의 광주로 하여금 광주비엔날레 주제를 불러들이게 된 뜻밖의 우연은 끝내 필연이 되고도 남는다. 이번 비엔날레 마시밀리아노 조니 총감독이 어느 날 뜻밖의 정중한 편지를 보내왔을 때, 그리고 직접 찾아와서 주제를 제의했을 때 나는 아기를 잉태한 만삭 임신부처럼 주저 없이 승낙했다.(편집자 주: 시인은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이 땅에 광주에 빚지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거든. 주제를 ‘만인보’로 잡은 건 의미 있는 미술기획이라고 생각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방한에 앞서 영어판 ‘만인보’를 이미 애독한 바 있어 그 시 속의 ‘만인’들을 통해 주제구상이 가능했다고 했다. 물론 이런 인연은 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광주비엔날레재단 이용우 상임부이사장의 정확성과 기민성에 잇대어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몇 해 전 그의 전시주제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에 대한 주제시를 썼고, 그 주제시는 내 시집의 한 작품으로 수록돼 있다.
만인보 30권이 완간된 올해는 5·18 30주년이 된 역사적 시점이기도 하다. 특히 26∼30권에 등장하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사자들, 관계자들의 자취들은 1970년대 이래의 민주주의에의 열망, 그 다음의 5월 광주의 민중성에 뿌리박고 있다. 이름 없는 삶들이 희생된 광주의 5월은 한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을 이뤘다. 어쩌면 5월은 저 1960년대 프랑스나 서독의 5월보다 훨씬 더 원생적(原生的)이다. 왜냐면 광주의 5월은 그 표상으로서도 지식인이기보다 민중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항쟁 10년 앞뒤로 ‘광주는 사상이다’라는 하나의 시대 표제를 주창해오고 있다.
광주의 사상은 누구의 사상이 아니다. 광주라는 집합명사의 극적인 응결과 그것의 내적인 폭발로 만들어진 삶의 가치화이다. 아마도 이런 근거가 나의 만인보 세계의 한 영역을 채우고 있는 ‘광주의 만인보’에 스며들어 이번 비엔날레 주제에의 친연성(親緣性)을 낳았는지 모른다. 바로 이 점에서 비엔날레를 이끌어가는 재단과 총감독, 그리고 실무진 여러분에게 격려의 인사를 전한다. 무엇보다 저 망월동 묘역의 영령들과 그 유족 및 부상자, 그리고 무등산 밑의 시민 여러분께도 만인적 의미의 예의를 바친다.
이로부터 광주는 30년 전의 기억과 30년 후의 전망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 사이의 삶들을 통합하는 현재일 것인가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광주는 살아있어야 한다.
※이 글은 고은 시인의 5·18민주화운동 30주년 ‘오월의 꽃’ 국제학술회의 기조발제를 광주비엔날레재단이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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