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진한 씁쓸함이 밀려온다. 이마에 깊게 팬 주름살을 가진 늙은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는 신세대 범법자들의 끝 간 데 없는 무지막지함에 질려 은퇴를 결심한다.
평생 활기 넘치게 싸워 왔지만 더는 젊은이들의 세상에 개입할 힘도 없고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두 발을 뺐다.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진 그가 돌아갈 곳은 옛집뿐이다. 은퇴 첫날의 고즈넉한 아침, 아내에게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표정에는 열패감이 짙게 묻어난다.
그런데 여기 그의 어깨를 다독여줄 만한 노인이 있다. 제32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 일본 대표로 선발된 히라타 히로노리 아마 8단. 일본의 유명한 아마추어 4명을 일컫는 ‘4대 천왕’ 중 한 명인 그는 올해 84세다. 교사 출신인 히라타는 1960, 70년대 기쿠치 야스로, 하라다 미노루, 무라카미 분쇼와 함께 제1세대 4대 천왕으로 맹활약했다.
지난달 19일 일본기원에서 치러진 대표선발전에서 히라타는 쟁쟁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6연승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8번째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최고령 우승 기록인 기쿠치 야스로의 73세 우승 기록도 갈아 치웠다.
84세의 국가대표. 이는 한 인간의 승리이자 바둑의 승리다. 세상 어느 종목에서 이 나이에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있겠는가. 아니 출전 자체가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이 대회 준우승자 다마키 다이스케 아마 7단은 25세로 히라타와 무려 근 60년 차가 난다. 한 갑자의 나이를 뛰어넘어 대등하게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종목이 또 어디 있겠는가.
히라타의 ‘젊은 노년’ 비법은 바둑이다. 바둑과 두뇌발달의 연관성을 의학적으로 밝혀낸 서울대병원 권준수 교수팀에 의하면 바둑 전문가 집단은 일반인에 비해 두뇌 영역들 간의 상호 연결이 더 치밀하다고 한다.
바둑은 두뇌 운동량이 폭발적인 놀이다. 다루는 정보량이 많고 연산 속도도 빨라야 하기 때문에 뇌 영역 간의 소통망이 고속도로처럼 확장된다. 바둑을 두는 그 자체가 두뇌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행위다. 바둑을 배워두는 것만큼 현명한 노후 대비책도 없다.
대부분의 스포츠 세계는 젊은이들 위주로 돌아가지만 바둑에서는 노인들이 결코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을 정진해온 실력에 주름살만큼 깊은 혜안까지 더해 젊은이들을 한 수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80대가 국가대표로 나서고 두 세대를 뛰어넘는 승부가 가능한 종목. 바둑이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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