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前중화민국 총통 일기를 통해 본 광복전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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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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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는 김구에 거액 전달… 한국에 어찌 후하지 않으랴”

중화민국의 기틀을 다진 장제스(蔣介石·1887∼1975) 전 대만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광복 후 귀국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을 지원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장제스의 일기를 통해서다.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2년까지 57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1915∼1917년과 1924년 일기는 분실됐고 나머지 53년분은 장제스의 유족이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 50년간 대여했다. 후버연구소는 지난해 그의 육필일기를 전부 공개했다. 다만 열람만 가능하고 사진촬영이나 복사는 안 된다. 신문역사와 한국근대사를 연구하는 일본 류코쿠(龍谷)대 이상철 교수(사진)가 지난달 2주일 동안 후버연구소에서 일기의 토씨 하나까지 베껴가면서 한국 관련 부분을 연구했다.

○ 장제스, 김구에 거액 지원

장제스와 김구는 여섯 차례 만났다. 2∼6번째 만남은 장제스의 일기에 기록돼 있으나 첫 번째 만남은 기록이 없다. 이 교수는 “일기를 분석한 결과 1932년 4월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 폭탄투척사건 이후 한국 임시정부에 주목하기 시작한 장제스가 그해 8월 초순경 김구를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6번 만난 김구-장제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자가 된 대만의 장제스 총통(오른쪽)과 백범 김구가 1930년대 초 난징군관학교에서 비밀회동할 때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6번 만난 김구-장제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자가 된 대만의 장제스 총통(오른쪽)과 백범 김구가 1930년대 초 난징군관학교에서 비밀회동할 때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후 두 사람은 △장제스가 카이로회담을 준비하고 있던 1943년 7월 26일 △1944년 9월 5일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10월 29일 △11월 4일에 만난 것으로 일기에 기록돼 있다.

주목할 부분은 여섯 번째 만남이 이뤄진 1945년 11월 4일(일요일). 장제스가 김구의 귀국을 앞두고 송별회를 베푼 날이다. 장제스는 이날 일기의 ‘지난주 반성록’이란 대목 첫머리에 “한국혁명당(한국독립당의 오기로 보임) 김구에게 1억5000만 프랑과 2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다”며 “우리(중국) 정부가 가난하긴 하지만 어찌 한국에 후하게 대하지 않을 수 있으랴”고 적고 있다. 같은 해 10월 18일 일기 ‘예정’ 대목엔 ‘김구에게 1억 위안 거출’이란 기록이 있다. 이 교수는 “거액의 외화는 김구 선생에게 전달된 게 틀림없으나 중국돈 1억 위안은 실제로 건네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며 “김구의 자금지원 요청을 받은 장제스가 중국돈으로 주려다 무슨 사정이 있어 외화로 바꿔 지급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해석했다. 장제스가 일기에 돈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 물심양면으로 한국독립 지원

일기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장제스의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943년 7월 26일 김구 선생은 한국독립 문제를 포함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카이로회담을 준비 중이던 장제스를 찾아간다. 이날 일기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오기로 보임) 김구 등을 만났다. 그들에게 내부단결에 힘쓰라고 권하고 격려했다. 우리(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조선독립 주장을 실현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돼 있다. 이 교수는 “전체 일기를 종합해 보면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할 테니 이게 실현될 수 있도록 한국독립운동세력이 단결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주문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은 장제스를 만날 때마다 임정 승인을 요청했는데 장제스는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승인을 미루기도 했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22∼26일 열린 제1차 카이로회담의 4개월 전부터 꼼꼼하게 회담준비 과정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란 항목을 빼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11월 22일 ‘예정’ 대목의 주요 사항은 ‘전후 조선의 독립’이었다. 11월 24일엔 “조선독립에 대해 특별히 루스벨트(미국 대통령)의 주목을 끄는 데 힘썼다”고 돼 있고, 1차 회담 직후인 11월 27일엔 “전후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승인하게 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라며 기뻐하는 모습이 나온다.

○ 한국독립에 처칠은 부정적, 루스벨트는 지지

카이로회담 직후의 일기인 ‘11월의 반성록’엔 “성명문을 마무리하기 전 3국 대표가 토론할 때 영국은 조선독립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려 했고…(중략) 미국 대표의 도움을 얻었기에 원안대로 만들 수 있었다”고 돼 있다. 처칠 영국 총리는 한국독립에 부정적이었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찬성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장제스는 처칠에 대해선 “인격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동열에서 운운할 수도 없다. 교활하다”고 혹평했고 루스벨트에 대해선 “진지하고 성의에 넘쳤다”고 칭찬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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