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이끈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감독 퇴임하는 김철리씨. ‘시라노 드 베르쥬락’으로 연출 컴백
올해로 10회를 맞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는 지난 5년간 이 축제를 이끌어왔던 김철리 예술감독의 고별 무대이기도 하다. 정들었던 그와의 작별이 아쉬워서일까, SPAF의 공식 캐릭터 스파피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년 365일 중 100일 이상은 해외출장 중이었다. 비행기 왕복 시간이 아까워 한번 출장 때마다 여러 나라를 엮어서 돌아다녔다. 시간에 쫓겨 하루 서너 편의 공연을 볼 때도 있었다. 그렇게 5년간 본 해외 공연 편수가 500편이 훌쩍 넘는다. 질은 물론 양으로만 따져도 국내 연극인 중 최다 기록으로 꼽힌다. ‘공연예술은 소문으로 선택하면 안 된다’는 믿음 하나로 그렇게 열심히 발품을 팔아 국내에 소개한 해외 명품 공연이 70여 편. 해외에서 ‘찰리 김’으로 더 유명한 김철리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예술감독(57)이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SPAF가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프랑스 민중극단의 ‘몰리에르 단막극 시리즈’로 시작됐다. 11월 14일까지 서울시내 주요 공연장에서 8개국 28개 연극과 무용이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이를 준비한 주인공 김 감독은 그 향연이 펼쳐지는 동안 연출가로서 복귀 무대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SPAF 예술감독에서 물러나면서 연출가로 컴백 무대를 갖기 때문이다. 22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할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이다.
“‘시라노’만 세 번째입니다. 1992년 대학로 학전극장 공연으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았고 2005년 SPAF 예술감독이 되기 직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 공연을 올렸죠.”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1897년 발표한 이 낭만극은 추남 시라노가 사랑하는 록산에 대한 연정을 미남인 크리스티앙의 연애편지 대필로 달래며 평생 순정을 지킨다는 내용.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인기로 최근 각광받고 있다. “겁이 나서 영화는 감히 못 봤다”는 그에게 사실 이 작품은 첫사랑과 같다.
“어릴 때 만화로 보고 좋아했는데 연극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대본을 보고 반했죠. 그렇지만 무대에 올리는 데 사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어요. 초연 땐 우리 연극판이 너무 거친 것 같아 순수함이 살아있는 ‘예쁜 연극’을 만들고 싶었고 2005년엔 젊은 배우들을 기용해 ‘젊은 연극’을 만들려 했어요. 이번엔 오히려 순수함이 훼손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발하는 ‘거친 연극’을 만들려고 합니다.”
시라노 역의 안석환, 록산 역의 김선경, 크리스티앙 역의 이명호 씨 등 베테랑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시공간에 현대성을 많이 가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친 연극’이 목표라지만 준비 과정은 섬세하다.
“저도 예전엔 ‘독재자’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배우와 스태프의 의견을 작품에 적극 반영합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서열의식이 강해서 혹시 선배 앞이라 자기 의견을 못 펴는 후배들이 있을까 봐 개별적으로 e메일을 통해 의견을 교환합니다. 세계적 공연을 접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열린 사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로 후배 연출가인 박근형 씨를 서슴없이 꼽았다. 희곡에 맞춰 배우를 바꾸기보다는 배우에 맞춰 희곡을 바꿀 줄 아는 민주적이고 쌍방향적인 연출 방식을 높이 평가해서다.
내년부터 SPAF 조직이 한국공연예술센터에 통합되면서 1년 일찍 물러나게 된 그의 숙원은 “SPAF를 해외를 바라보는 창뿐 아니라 해외로 나가는 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올해부터 SPAF 국내 참가작을 과거 우수작에서 공동제작 형태의 신작 중심으로 바꿔나간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게 세계무대에 통하기 위한 첫 과제가 뭐냐고 물었다. 답은 “살아있는 말(言)”이었다.
“세계무대에서 언어를 거추장스럽게 여겨 몸에만 집중하는데 공연의 기본은 말입니다. 정확한 발성과 적절한 화법을 통해 먼저 우리 관객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해지면 세계 어디를 가서도 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말보단 몸에 집중합니다. 그게 더 빠르거든요. 그러나 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자리걸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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