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눈매와 콧등의 냉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탐욕으로 늘어진 안면근육을 일그러트리며 이강모를 향해 마지막 몸짓을 날린다. 하지만 욕망의 바벨탑과도 같은 마천루에서 떨어져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나이.
악마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각인돼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의 최후는 처참한 듯 했으나 평생을 지배해온 욕망의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허무했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명암을 인간의 욕망과 맞물려 풀어나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의 조필연(정보석 분)은 악의 근원 그 자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인물이다.
조필연이 육군 장교에서 중앙정보부 감찰부장으로, 그리고 다시 국회의원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음모와 계략의 연속이었고 그 결과 그는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악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조필연은 권력과 자본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공포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필연은 기존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그래서 평범한 악인이 아니다. 전형적인 악인은 자신의 욕망보다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악행을 거듭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반면에 조필연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면서 승승장구한다. 그 어떤 악행이라 해도 권선징악의 틀에서 단죄되는 것과 달리 조필연이 끝까지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물론 조필연은 억울하게 삶을 마감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랜 치욕의 시간을 견딘 이강모 형제에게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부와 권력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그릇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조필연을 전형적인 악인이라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강모와의 악연은 조필연이 용도 폐기 직전의 육군 장교 신분에서 중앙정보부 감찰부장으로 옮겨가기 위한 자금원으로 밀수 금괴를 착복하는 과정에서 이강모 아버지 이대수(정규수)를 살해한 것이 발단이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필연에게 이강모(이범수)와의 악연은 자신의 욕망 충족을 방해하는 귀찮은 걸림돌일 뿐이다. 걸림돌은 제거하면 그만이다.
조필연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달려드는 이강모를 눈의 티끌로도 여기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보다 약자여서가 아니라 간단히 제거하면 되는 걸림돌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필연은 갓 출산한 몸으로 갓난아이를 업고 삼남매와 함께 도망치는 어린 이강모 가족을 죽이기 위해 거침없이 총을 발사한다.
막대한 개발 이익이 보장된 이강모 명의의 땅을 독차지하기 위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이강모를 죽이도록 교사하는 것 또한 조필연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일 뿐이다.
막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황태섭(이덕화)이 절친한 친구 이대수의 죽음을 목격한 현장에서 조필연에게 무릎을 꿇고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그의 행동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필연은 사람을 죽이고도 오히려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충성을 다짐받을 정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냉혈한이다. 친구의 죽음을 방치한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형성된 황태섭과의 관계를 자신의 정치적 욕망 충족의 도구로 활용할 정도로 조필연은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건설업 종사자의 책임감으로 열심히 건설 현장을 누비며 성장시킨 황태섭의 '만보건설'을 자신이 잠시 맡겨둔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탐욕 그 자체이다.
악의 근원으로서 조필연의 면모는 자식 앞에서도 전혀 변함이 없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 해도 자식 앞에서만큼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조필연은 아들 조민우(주상욱)에게 악마의 유전자를 이식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무자비하게 행동한다.
부와 권력을 향한 조필연의 탐욕은 아들 조민우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증오할 정도로 혐오스럽다. 그럼에도 피는 속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시키듯, 조민우는 어느새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필연은 그렇게 자신을 닮아가는 아들을 여전히 불만스러워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감상성'이 아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의 아이, 그러니까 자신의 핏줄을 임신한 여자 이미주(황정음)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거침없이 낙태를 강요한다.
아무리 독한 악인이라도 자신의 혈육 앞에서는 대부분 미약하나마 심리적 동요를 느끼는 것과 달리 조필연에게서는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조필연이고, 그러니까 악의 근원이다.
자신의 욕망에 근거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악인이라는 점에서 조필연은 분명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으로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에게 "증오심은 목표를 정하는데 훌륭한 동기가 된다"며 힘을 더 키우라고 충고하는 것도 조필연이기에 가능하다.
그는 증오심 가득한 아들의 눈빛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악인 특유의 지론을 강조하기도 한다. "악인들은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가치관을 세상에 담은 것뿐이다. 나약하곤 조잡한 인간들이나 그들을 악인이라 부른다"는 논리는 조필연을 악인으로 분류하기 어렵게 만든다.
부와 권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할 나위 없는 악행을 일삼던 조필연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서 자신의 안위보다 수족처럼 부리던 부하들을 먼저 챙기는 것도 자신의 행동을 악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캐릭터이기에 조필연을 전형적이어서 평범한 악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야비한 웃음소리에 스미어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만이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일 뿐이다.
이기는 것이 선(善)이고 지는 것이 악(惡)이라 생각하는 조필연에게 '정의'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의란 "인생의 패배자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는, 인생의 패배자들이 들어놓는 보험 같은" 것이며, "정의보다 중요한 건 바로 승리"이다. 성공이 곧 승리이며, 그 승리가 정의가 된다는 조필연의 논리는 성공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대한민국에서 '악의 근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정당성을 부여하는 조필연이 존재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우리는 지금 악의 근원으로서의 조필연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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