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힘없는 군주-평화주의자’ 가면을 벗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9일 03시 00분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오현숙 옮김/944쪽·3만5000원/삼인

박환무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박환무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이 책은 미국의 일본사 연구자 허버트 빅스가 쓴 일왕 히로히토(1901∼1989)의 일대기다. 2000년 출판되자마자 ‘이코노미스트’가 ‘폭탄’이라고 평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미국에선 200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으며 2002년 일본에서 번역서가 출판되자마자 해리 포터 시리즈의 최신작 매출액을 능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이런 폭발적 반응은 이 책이 이제까지의 ‘조작된’ 히로히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실증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히로히토는 군부에 떠밀려 마지못해 침략 전쟁에 동의한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은 어려서부터 전제군주로 길러졌고, 전쟁에서 누구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저자는 밝힌다.

히로히토가 맞닥뜨린 최초의 시험대는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올바르게 판단을 한다면 그는 관동군의 침략 확대 행위를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 역시 그 행위의 성공 여부에 있었기에 ‘도쿄 사령부에 대한 관동군의 불복종 같은 걱정은 나중 문제’라는 메시지를 군부에 전달함으로써 전쟁을 방조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에 관해서도 저자는 히로히토의 책임론을 거론한다. 저자는 히로히토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자료의 제약 때문인지 이 사실을 날카롭게 추궁하지는 못하고 있다. ‘고노에 정부가 난징 대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일왕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정도의 추측에 머물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은 1941년 12월 대미 전쟁 개전에 관한 부분이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대미 교섭을 공작했지만 실패했고, 히로히토는 고노에 총리를 버렸다. 즉 태평양전쟁의 개전 결정에 히로히토의 영향이 컸다는 뜻이 된다.

히로히토는 그 뒤로 ‘평화주의자’라는 조작된 이미지를 되찾을 기회가 있었으나 정치 지도자로서의 자질 미비로 이를 놓쳤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1945년 봄부터 여름에 걸친 시기의 일로, 이때 히로히토는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

첫째, 히로히토는 1945년 2월 이후 소련이 ‘일소중립조약’을 언제라도 파기해서 일본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고노에 등의 보고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둘째, 미국 영국과의 직접 교섭을 마지막까지 주저했다. 5월 독일 항복, 6월 오키나와전투 패배 후에 미국 영국과의 교섭에 착수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7월 하순에는 포츠담선언을 두 번에 걸쳐 거절했다. 항복을 빨리 하고 그 책임을 스스로 짐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구했더라면 ‘자비로운 군주’라는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터이다.

이와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면 적어도 오키나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패전 이후 많은 일본인의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의문이기도 하다.

전후 미국 점령군은 일왕을 ‘여왕벌같이 일본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존재’(전 주일 미국대사 조지프 그루의 말)로 인식하고 그의 전쟁 책임을 불문에 부쳤다. 그래서 스스로 결단하지 않는 연약한 일왕의 모습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전후 세계에 비친 히로히토의 이미지는 맥아더와 함께 찍은 사진과 미키마우스와 함께 찍은 사진 두 장으로 굳어졌다. 미키마우스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히로히토는 “아, 그래”라고 대답만 하는 힘없는 늙은 군주상이다.

1989년 1월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일본 정부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세계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일편단심으로 기원하시고, 날마다 몸소 실천해 오셨습니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에서 전쟁의 참화로 괴로워하는 국민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결심하셔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리셨습니다.”

저자는 많은 일본인에게 이런 일왕의 모습은 ‘기분 좋은 픽션’이며, 히로히토는 일본인이 전시에 당한 억압의 주요한 상징이 됐다고 말한다. 저자는 히로히토의 허상을 한장 한장 걷어내며 그 실상을 밝히는 작업을 이 책의 과제로 삼았다. 탐구의 결과 히로히토는 군부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며 수동적인 입헌군주도, 일본 제일의 평화주의자도, 반군국주의자도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다. 오히려 그는 주요한 정치적, 군사적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공세, 학살은 물론이고 미국에 맞선 전쟁에서는 전진과 후퇴 같은 소소한 전술까지 모두 장악하고 통제한 전쟁 지도자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의 측근들은 내각의 결정이 정식으로 제출되기 전 그의 견해가 결정에 포함되도록 진력했다. 이에 따라 히로히토의 의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의 찬성과 반대야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히로히토가 군부의 폭주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마음 아파했다는 조작된 이미지를 저자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히로히토가 최고사령관으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은 각종 사료를 토대로 이 책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런 히로히토의 모습을 지금까지 기피해 왔다.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자신들의 전쟁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징병, 징용 등에 대한 배상 문제,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역사 인식 문제 등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박환무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한 살 때 히로히토(왼쪽), 1928년 11월 전통예복을 입고 있는 모습(가운데), 1942년 이바라키 현 항공기지에서 해군 항공대의 비행 훈련을 시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삼인
한 살 때 히로히토(왼쪽), 1928년 11월 전통예복을 입고 있는 모습(가운데), 1942년 이바라키 현 항공기지에서 해군 항공대의 비행 훈련을 시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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