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신진 작가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중견화가 강형구 씨(56)의 ‘시대를 그리다’전과 고낙범 씨(50)의 ‘Color Pause’전은 새로운 소재가 아닌, 새로운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오래된 소재에서도 이를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신선한 감성을 담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전시에서 얼굴을 클로즈업한 초상화를 만났는데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경기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12월 12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강 씨는 2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에 자화상과 사회적 영향을 끼친 인물을 과장되게 확대된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031-761-0137
이에 비해 11월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고 씨가 선보인 초상화의 경우 누구를 그렸는지는 부차적 문제다. 색이 중요하다. 그는 모든 대상을 색채에 대한 지식으로 번역해 의미를 부여한다. 02-547-9177
이들의 새로운 모색은 관객에게 시각적 즐거움과 충격을 준다. 각자 고유한 스타일을 갖고 있으면서 극한의 노동과 땀이 배어든 작품이란 점에선 공통적이다.
○ 색이 말하다
“색채를 언어화하는 것이 내 작업이다.”
색채화가로 불리는 고 씨는 이 전시에서 명화 속 색채 요소를 분석해 재구성한 수평의 색띠, 수직적 단색 초상화 등 초기작과 최근 집중해온 사선(斜線)의 감각을 변주한 ‘피부’ 작업까지 40여 점을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 뮤지엄 프로젝트에서 그는 명화의 선택, 분석, 번역,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시작한다. ‘초상화 미술관-Green’(1997년)의 경우 카라바조의 ‘병든 바쿠스’를 원전으로 삼아 그림에서 추출한 녹색 톤의 색띠를 바탕으로 7명의 남성을 각기 다른 녹색의 스펙트럼으로 그렸다. 사실적인 단색 초상화같이 보이지만 색으로 인물을 코드화한 일종의 추상적 초상으로 평가받는다. 여성을 소재로 한 초상화 미술관은 오방색을 바탕으로 제작돼 세계와 우주를 포용하는 여성성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드러내 흥미롭다.
최근작으로는 오각형과 사선(斜線)의 시각성을 보여주는 기하학적 추상, 영화와 공연의 내러티브를 회화적 이미지로 번안한 작품을 선보였다. 모든 작품에서 추상과 구성, 논리와 비논리, 사유와 감각이 공존하는 의미의 중층 구조가 돋보인다.
○ 눈빛으로 말하다
영은미술관에 들어서면 화가의 자화상과 윤두서의 자화상을 재현한 초대형 작품이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쏘아본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부위는 눈이라고 믿는 작가의 눈동자 표현이 깊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대가에 대한 경의와 도전정신으로 완성한 윤두서 초상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자신을 극사실주의 화가로 평가하는 시선에 대해 사진이 담을 수 없는 허구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답한다. ‘차가운 외면성’을 강조하는 하이퍼 리얼리즘과 달리 철저하게 내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극사실 기법을 차용할 뿐이라는 것. ‘시대를 그리다’는 제목에 걸맞게 전시장에는 반 고흐, 링컨, 앤디 워홀, 메릴린 먼로 등이 등장한다. 알루미늄판, 캔버스에 그린 작품과 입체 작품도 있다. 에어브러시로 밑칠을 한 뒤 못과 이쑤시개 등으로 얼굴의 솜털과 주름, 터럭 한 올까지 세밀하게 표현하는 과정을 감내한 화가의 노고를 엿볼 수 있다.
치열한 성찰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잔인할 정도의 집중력이 오롯이 녹아든 두 전시. 나태한 마음을 일깨우는 색채의 기, 눈빛의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지적 사유와 수공(手工)이 어우러지며 묵직한 울림을 길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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