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을 가장 열심히 한 왕은 세종과 성종, 영조였습니다.” “경연에서는 군주의 학식과 인품이 드러납니다. 요즘 TV 드라마에서 ‘깨방정’으로 불리는 숙종도 경연 기록을 보면 명민하고 신하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던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아침 점심 저녁 경연(經筵)을 열어 학자들과 지식을 쌓고 토론을 벌였으며 때론 이 자리에서 국가 운영 방안을 논의했다.
조선시대 왕들의 경연에 관한 기록이 처음 집대성된다. 2005년 9월부터 경연자료 집성 작업을 해온 연세대 국학연구원 경연연구팀은 최근 작업을 마무리 짓고 출판을 앞두고 있다. 모두 32권으로 권당 9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24명이 작업에 참여했고 현재 한글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집성 작업을 해온 김우형 연구교수는 “경연은 곧 국정 운영의 장”이라고 설명했다. 신하와 왕이 책을 소리 내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해석하는 방식의 경연은 왕의 성향에 따라 분위기가 달랐다. 선조의 경우 말수가 적어 율곡 이이가 나서 “왕께서 말을 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왕을 어려워해 하고 싶은 말의 10분의 2에서 3 정도만 말하게 된다”고 간언하기도 했다. 영조는 신하가 책을 읽다 틀리게 읽으면 호되게 혼내고 열심히 공부해 신하들이 기진맥진할 지경이었다.
연구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 왕으로 꼽은 세종과 성종, 영조는 하루 세 번 이뤄지는 경연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의 경연 내용은 정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한정길 연구교수는 “기록에 ‘조강(아침 경연)을 했다’ ‘석강(저녁 경연)을 했다’는 식으로만 적혀 있고 내용을 알 수 없어 안타깝다”고 전했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의 면모는 경연에서도 나타났다. 경연에서 다룰 책을 스스로 정하기도 했고 경전 이외의 책을 골라 공부하기도 했다. 아악을 완성하기 이전에는 중국 음악이론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독했고 태조 때 발간한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공부해 그 내용을 다듬기도 했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는 재위 11년부터 성균관에 더 큰 관심을 보여 경연을 줄였다.
경연을 소홀히 한 왕으로는 태종과 세조, 연산군이 꼽혔다. 태종과 연산군은 주로 안질이나 부스럼 등 병을 이유로 경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세조는 “정사를 돌보느라 시간이 없고, 세종 때부터 물려받은 일이 많고, 각종 책을 만드는 데 관여해야 하고, 나이가 불혹이 되었고, 무예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다섯 가지 이유를 대며 경연을 물리쳤다. 연산군은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다.
경연 집성 과정에서 국학연구원의 연구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마침표와 쉼표, 느낌표나 따옴표 등 표점을 찍는 과정. 왕조실록에는 표점이 있지만 승정원일기와 문집에는 없어 일일이 읽고 해석하며 표점을 찍었다. 김영봉 연구교수는 “잘못된 글자에 각주를 담아 바로잡고 표점을 표시해 앞으로 연구자들이 경연에 대해 공부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원들은 현재 매주 목요일 개인 문집에 기록된 경연 자료를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진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연의 기록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놓친 부분을 다시 찾고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까지 마무리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윤훈표 연구교수는 “경연 자료 구축 사업이 끝나면 동시대 동아시아 왕들과의 국정 운영 비교 등 다양한 연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가르치던 제도. 중국에서 비롯돼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됐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다. 경연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경연에 참석한 경연관들의 문집 등에 분산돼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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