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쇠붙이도, 묵직한 돌덩이도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생명의 숨결이 스며든다. 딱딱한 철판에서 날렵한 새의 형상이 태어나고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인물상은 순후하다.기계적인 완벽함보다 비례와 대칭이 조금씩 어그러지고 사람 손으로 매만지고 용접한 흔적을 오롯이 남긴 작업에서 인간미가 느껴진다.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철 용접조각의 새 역사를 연송영수(1930∼1970)의 40주기를 기념한 회고전이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2월 26일까지 열리는 ‘한국 추상철조각의 선구자 송영수’전. 조각과 드로잉 등 60여 점을 통해 그의 개척자적 열정과 실험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27세에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에 오른 송영수. 아카데믹한 인체 조각이 대세였던 시대적 상황에서 그는 쇠와 불을 이용한 철 조각을 파고들면서 독보적 발자취를 남긴다. 건설부로부터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의뢰받아 작품 제작을 추진했던 그는 안타깝게도 4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가족나들이 한 번 가지 못할 정도로 짧은 생애를 조각의 제단에 바친 예술가. 그와 교유했던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는 이런 비문(碑文)을 남겼다.
‘피 없는 돌에 생명을 주고 거친 쇠붙이에 아름다운 영혼을 깃들이게 한 사람/마흔한 살의 자기 나이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살며 그는 이곳에 잠들어 있다.”
○ 가지 않는 길
금속 용접과 ‘추상표현조각’을 결합한 송영수의 회고전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통해 한국 조각계에 조형적 혁신을 가져온 과정을 엿보게 한다. 첫머리는 울퉁불퉁한 용접 자국이 남은 ‘십자고상’과 추상적 형태의 ‘순교자’ 등 가톨릭 신앙이 투영된 작품이 자리한다. 독실한 신앙심과 창조적 기량이 어우러진 작품은 종교에 상관없이 웅숭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어지는 공간에선 국전 출품작과 1960년대 조각을 볼 수 있다. 전통조각의 볼륨을 넘어 선으로 공간표현을 시도한 작품들이다. 1957년 ‘부재의 나무’는 그가 처음 시도한 용접 조각. 드럼통에 그림을 그린 뒤 잘라서 유기적 형태로 이어 붙였다. 1960년대 작업은 절정의 표현력과 기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손과 발을 아슬아슬하게 맞잡은 ‘곡예’, 마지막 조각인 목이 꺾인 새 등에서 균제 속의 파격, 비정형의 격렬한 형태, 용접 과정에서 나타나는 표면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제자인 조각가 강희덕 씨는 “선생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성과 포용성”이라며 “직선보다는 휘어진 선, 나사가 빠진 듯 조금은 헐겁게 용접한 부분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개막식에 앞서 작가의 아내 사공정숙 씨(고려대 명예교수)는 상기된 얼굴로 전시장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예술을 위해 태어나 삶을 불태우다 불속으로 사라진 사람이다. 항상 호주머니에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면서 전차에서도 작품을 그렸다. 머리맡에 수첩을 놓고 자다말고 일어나 드로잉한 뒤 나를 깨워 ‘좋지? 좋지?’라고 말하며 행복해했다. 막내의 생일날, 집을 나서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나는 참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 외로운 길
전시장도 관객도 없는 60년대에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 조각가의 작품을 만난 뒤에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의 ‘2010 오늘의 작가’전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이곳에선 11월 11일까지 배형경 씨(55)의 ‘생각하다, 말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배 씨는 ‘지난 30년간 한국 조각계의 비주류로 전락한 표현주의 구상조각, 인체조각’을 고집해 온 조각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을 내면화해 철과 브론즈로 고독한 인간 군상을 만든다. 맑은 가을 하늘 한 번 쳐다볼 새도 없이 온종일 작업에 매달린다는 작가. 전시장에는 자신만의 고독, 무거운 짐을 진 인체상이 자리해 존재의 원초성에 질문을 던진다.
추상과 구상, 서로 다른 시각에서 표현주의적 조각을 선보인 두 전시. 오늘날 쉽게 만나기 힘든 전통조각의 조형적 매력과 깊이를 당당히 녹여낸 시간의 결정체와 마주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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