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동결된 음악이라는 괴테의 말을 뒤집으면 음악은 녹아 흐르는 건축이 된다. 연극 ‘33개의 변주곡’(모이시스 카우프만 작·김동현 연출)은 그 ‘녹아 흐르는 건축’을 무대언어로 재구축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다.
이야기는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근육세포가 굳어지는 루게릭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미국인 음악학자 캐서린(윤소정)이 외동딸 클라라(서은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필생의 연구에 몰두하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말년의 베토벤(박지일)이 귀가 먼 상태에서 비엔나의 악보출판업자 안톤 디아벨리(이호성)가 작곡한 50초짜리 왈츠 곡을 4년에 걸쳐 무려 50분짜리 변주곡으로 발전시켜간 이야기다.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연주곡 중 가장 심오한 곡이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라이브 피아노 반주로 디아벨리의 흥겨운 왈츠 곡과 베토벤의 변화무쌍한 변주곡들을 비교해 들으면서 그 진가를 확인하게 된다. 캐서린의 설명이 없다면 도저히 같은 주제를 사용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병치된 두 개의 이야기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접점을 이룬다. 캐서린은 베토벤이 왜 디아벨리의 왈츠 곡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원인을 추적한다. 병든 몸을 이끌고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보관된 베토벤 자필 악보 스케치들을 몇 개월간이나 검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라는 그렇게 연구에 몰두하느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자신에게 나눠주지 않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베토벤의 비서인 안톤 쉰들러(박수영)도 마찬가지다. “왜 합창 교향곡과 장엄미사곡을 팽개쳐 두고 ‘구두수선공의 헝겊조각’ 같은 곡을 변주하는 일에 저토록 매달리시는 걸까.”
캐서린은 명백히 베토벤의 변주다. 하지만 그 변주는 또 다른 변주를 낳는다. 하나의 주제에 몰입하는 어머니와 반대로 어떤 직업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클라라는 그 캐서린의 역(逆)변주다. 캐서린의 연구에 획기적인 힌트를 주는 클라라는 다시 베토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디아벨리의 변주이고, 클라라와 사랑에 빠져 캐서린을 돌보는 간호사 마이클(이승준)은 디아벨리를 질투하면서 병든 베토벤을 돌보는 쉰들러의 변주다. 베토벤 하우스의 사서인 거트루드(길해연)은 그런 다양한 변주를 가능케 하는 기준음이다.
이런 캐릭터의 변주는 과거와 현재, 뉴욕과 본, 비엔나라는 시공간이 뒤섞이면서 발전해간다. 과거와 현재의 두 개 트랙을 따라 진행되던 연극은 세 그룹, 네 그룹으로 분열하다 급기야 일곱 명의 등장인물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치는 합창과 왈츠로 대단원을 장식한다. 평범함 뒤에 숨은 비범함을 깨닫는 순간이자 등장인물의 수가 7음계의 음표 수와 일치함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원작의 중층적 구조를 잘 살린 연출과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개성 넘치면서도 안정된 연기 앙상블은 고급스러운 실내악 연주를 연상시켰다. 특히 대상포진에 걸린 불편한 몸으로 루게릭 환자 역을 소화한 윤소정 씨의 연기 투혼과, 베토벤과 너무도 닮은 박지일 씨의 연기 변신에 박수를 보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5만 원. 11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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