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출신 피아노 거장 라두 루푸가 31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루푸는 1966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3년 뒤 리즈 콩쿠르까지 석권하며 40년 넘게 세계 피아니스트계의 최정상 위치에서 활동해왔다. 국내 라이선스 음반의 여명기였던 1970년대에 20대의 나이로 데카 레이블에서 슈만과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 슈베르트 즉흥곡집 등 수많은 명 음반을 내놓으면서 일찌감치 한국 클래식팬들에게도 ‘마음의 친구’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연주가 40년 이상 갈채를 받아온 가장 큰 비결은 무엇보다도 깊이 있는 해석으로 가슴을 움직이는 중후한 연주. 특히 19세기 슈베르트, 브람스, 베토벤 등 독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에 대한 분석적이면서도 감수성 넘치는 해석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번 공연에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57 ‘열정’,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Bb장조 D960, 야나체크 ‘안갯속에서’를 선보인다.
그는 공연 준비가 충분치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는 완벽주의자로도 유명하다. 이달 일본 투어 중 15일부터 모든 공연 일정을 취소한 것도 그 때문. 공연 주최사인 마스트미디어는 “자신의 컨디션이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 공연을 아예 취소한 것으로 안다. 스위스 제네바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한국 공연은 예정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푸는 내한에 앞서 공연에 쓸 피아노 건반의 무게를 물어봤고, 피아노 보관소가 아닌 실제 무대에서 연주에 쓸 피아노를 고르고 싶다고 부탁했을 정도로 깐깐한 면모를 확인시켜줬다. 주최 측은 단지 피아노를 고르기 위해 예술의전당 대관 일정을 추가로 잡았다.
이 고집스러운 연주가는 지금까지 40년 넘도록 언론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오직 연주를 통해서만 관객과 소통하겠다는 일념이다. 영국 국적을 갖고 있으며, 스위스 국적의 부인과 함께 스위스에 살고 있다는 정도가 알려진 그의 사생활. 오로지 건반을 통해서만 말을 건네는 ‘침묵의 피아니스트’를 만날 곳은 공연장밖에는 없다. 5만∼13만 원. 02-541-3183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두 연주가가 본 라두 루푸
10대 때 이미 중후하고 깊이있는 연주
라두 루푸를 처음 본 것은 1965년 베토벤 빈 콩쿠르였다. 당시 그는 10대였지만 이미 음악적으로 완숙했다. 보통 젊은 연주가들은 패셔너블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중후하고 깊이 있는 내면을 표현했다. 그 뒤에도 베토벤 협주곡 연주나 런던에서 열린 독주회 등을 통해 그의 연주를 자주 접했다. 그때도 젊은 연주가가 굉장한 깊이와 무게감을 지녔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후 더욱 완숙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루푸는 사생활을 감추고 은둔한다는 이유로 ‘괴짜’ 이미지가 있는데 내가 만나본 그는 다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내 음악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1시간 거리를 차로 달려 직접 찾아왔다. 편안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신수정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피아니스트)
슈베르트 연주는 죽기 전 꼭 들어봐야
루푸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악기를 통해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극히 드문 피아니스트다. 기술적으로 악기를 명확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음악가라고 부를 만하지만 루푸는 음악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예술가다. 1980년대 중반 파리음악원 유학 시절 그의 연주를 처음 들을 때부터 큰 감흥을 받았다. 그 감동이 내 음악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특히 루푸의 슈베르트 연주는 최고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말로 유명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처럼 루푸가 연주하는 슈베르트는 죽기 전에 꼭 들어봐야 한다.
루푸는 인터뷰 없이 음악에만 전념하는 상태가 수십 년 동안 이어지다 보니 그 사실 자체도 일종의 홍보가 되는 셈이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도 가는 길이 뚜렷하고 정체성이 명확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