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하순. ‘걷는 문화사학자’ 신정일 씨(사진)를 따라 강경(충남 논산시)을 답사했다. 신 씨는 오로지 걸으며 이 땅에 묻힌 유산을 발굴해 ‘신택리지’ 연작으로 엮어내는 ‘우리 땅 걷기 모임’의 대표. 그날은 출판사 타임북스가 ‘신택리지’ 발간에 맞춰 한국철도공사와 함께 마련한 ‘기차타고 도보여행’의 참가자 160명도 함께 갔다. 그가 굳이 강경으로 안내한 이유는 ‘택리지’ 탈고(1751년)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강경의 팔괘정에서 이뤄져서다.
이 책은 이중환(1690∼1756)이 30년간 전라 평안 두 도만 빼고 전국을 다니며 수집해 정리한 지리 사회 경제 연구서. ‘진정 사대부가 살 만한 땅은 어딜까’라는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그가 펼친 순행(巡行)의 결과다. 도별로 나눠 벌써 다섯 권의 ‘신택리지’를 낸 신 씨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살 만한 땅이요? 그게 따로 있을까요. 어디든 자기 스스로 만들어야지요.” 풍요의 가을은 논산에도 왔다. 강경 논산의 너른 들판은 누런 알곡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푸른 금강은 가을하늘을 담아 더더욱 푸르다. 먼 길 날아온 기러기 떼는 벌써 탑정호 노을 진 서편 하늘을 가로지르고 서해서 놀다 고향 찾아 금강 거스른 숭어 떼도 강경천 다리 밑에서 소란스럽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1925∼1980)가 즐겨찾던 장터골목 탁배기(막걸리)집인 서산집도, 욕을 바가지로 해대던 그 집 욕쟁이 할매도 가고 없는 강경의 옛 장터. 그래도 시(詩)는 남아 가을밤 골목길 헤매는 길손의 헛헛함을 뭉근히 달래준다. 강경 하면 젓갈, 젓갈 하면 객주가 떠오른다. 일확천금 꿈꾸며 강경포구로 몰려온 팔도상인, 그네들에게 방 내주고 밥해주며 물건 잡아 자금융통 해주던 거간꾼과 객주, 그 틈에서 먹고살던 사람들로 한때는 어깨 부딪지 않고는 길을 걸을 수 없을 만큼 성시였다던 한국의 3대 시장 강경포구. 여기서 지금 ‘강경발효젓갈축제’(24일까지)가 한창이다. 포구는 흔적뿐이고 객줏집은 사진 속 유물로 쇠락했지만 그래도 변치 않은 게 있다. 소금 짠맛에 압도되지 않고 생선 육질과 맛을 간직한 채로 잘 발효된 강경젓갈이다.
이 가을 한가로이 기차에 몸을 싣고 금강 물가의 강경과 백제유산이 살아 숨쉬는 논산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 걸어서 강경 둘러보기
출발은 강경역. 젓갈시장 사거리로 나가 국도 23호선을 따른다. 강경천을 가로지르는 강경교를 건너면 오른쪽 둑길로 걷는다. 한참 가다 보면 둑 아래 뜬금없는 돌다리가 보인다. 조선시대 미내(渼奈)다리다. 당시 미내천 물길이 바뀌어 지금은 둔치에 얹힌 형국. 무지개 모양의 홍예는 자태도 곱다. 여기에 다리가 놓인 것은 한양과 남부 삼남지방(경상 전라 충청)의 접점이어서다. 당시 강경천은 충청 전라의 경계다. 길이 30m, 너비 2.8m, 높이 4.5m.
다음 행선지는 옥녀봉. 80m 높이의 언덕 형상이지만 평지 강경에서는 어엿한 산이다. 위치는 강경천 논산천이 합류하는 금강변. 찾기도 쉽다. 강경천 둑길 끄트머리다. 꼭대기의 주변 전망은 멋지다. 금강과 읍내, 금강 건너 부여군 세도면과 10km 밖 논산 시가는 물론이고 멀리 대둔산까지 훤하다. 논산 강경의 황금들녘도 한 눈에 들어온다. 산정은 거대한 팽나무 차지. 그 옆에 봉화대와 팔각정이 있다.
팔분능선 둔덕의 폐가 한 채, 허름한 가겟집이 눈길을 끈다. 폐가는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 이 가게는 이곳에 일제가 지은 신사의 관리사로 손옥례 씨(76)가 시어머니 유옥녀 씨와 함께 46년간 살아왔다. ‘옥녀봉에 사는 옥녀’로 유명한 110세의 논산 최고령 유 할머니는 18일 작고했다.
옥녀봉로 73번길로 내려가다 보면 한옥교회를 지난다. 문화재로 등록된 ‘강경 북옥감리교회’(강경읍 북옥리 96)다. 정면 양편에 설치한 출입문은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의 유산이다.
강경발효젓갈축제가 열리는 금강둔치체육공원도 옥녀봉 밑이다. 공원과 산 사이로 개천이 흐르는데 배가 짐을 부리기 위해 장터로 드나들던 물길. 일제는 갑문을 설치해 물을 가둬 썰물 때도 짐 싣고 부리는 데 불편이 없도록 했다. 현재 갑문 안쪽에 옛 갑문 흔적이 있다. 일제 수탈물자의 수출항 혹은 집하지로 이용된 역사를 말해준다.
포구 내 물길에는 늘 배 수십 척이 정박돼 있었다. 주변은 객주의 창고가 즐비했고. 팔도 상인이 유숙했던 객줏집과 여관, 식당은 갑문 근방 옥녀봉 기슭을 빽빽이 뒤덮었다. 그 광경은 정미소 터에 포구 노조사무실 등 일제수탈 현장을 재현한 시민공원에 걸린 옛 사진에 남아 있다. 주야로 상인과 짐꾼, 객주, 어부로 넘쳐나던 강경포구. 20세기 들어 철도와 도로가 수운을 대체하는 바람에 쇠락한 지금은 옛 영화만 추억하는 소읍으로 추락했지만 강경이 대전보다 먼저 읍으로 승격된 역사는 아직도 노인들의 자랑거리다.
○ 강경읍 곳곳에서 만나는 근대 건축물
발길을 돌려 강경교 부근의 강경읍 초입으로 가보자. 중앙초등학교와 강경고 강경여중 강경상업정보고가 국도 23호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강경고와 강경여중은 스승의 날 발상지다. 은사에게 꽃을 달아드리던 것이 1963년 스승의 날로 정해진 것이다. ‘강상’(옛 강경상고)이라 불리던 강경상업정보고는 재무부 고위관리 여럿과 시인 김관식 박용래를 배출한 명문교. 1905년 개교한 중앙초등학교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빨간 벽돌건물이 있다.
중앙초등학교 뒤로 돌아 들어가면 옛 강경장터. 일제 당시를 상기시키는 일본식 2층 건물이 키 낮은 옛 건물 틈에서 간간이 눈에 띄는데 전체적으로 1930∼60년대 건물이 많다. 그래서 걷다 보면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이라는 벽돌건물. 일제하 조선은행이 전신이다. 또 하나는 근대기 한옥의 전형인 남일당 한약방. 1923년에 지은 목조 2층 건물로 지금도 건재하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 후 배로 천신만고 끝에 서해를 건너 강경포구로 상륙한 뒤 첫밤을 보낸 집터도 근방(홍교리 100-1)에 있다. 현재 강경성당 신자들이 집터를 구입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욕쟁이 할머니의 선술집 골목에서 만난 서창집 탁배기
읍내 옛 장터에서 서산집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서산집은 박용래 시인이 탁배기 잔을 기울이던 선술집으로 ‘욕보집’으로 더 잘 통했던 곳. 서산 출신 여주인 입이 워낙에 걸어 탁배기보다 욕을 더 많이 먹는다는 집이었다. 하지만 시인도, 여주인도 세상 뜬 지 오래고 그 집 역시 여염집으로 바뀌었다. 옆에 또 다른 욕쟁이 할머니의 목포집이 있었으나 역시 사라졌다.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서산집 목포집의 대를 이을 만한 투박한 탁배기 식당 ‘서창집’을 ‘발굴’해서다.
서창집은 옛 장터 골목의 유일한 선술집. 토박이 최삼순 씨(60)가 혼자 운영하는데 식당 비운 채 밭일 나가서도 휴대전화로 기별만 하면 내쳐 달려와 밥과 술을 내는 영락없는 옛날 탁배기집이다. 홀 안에 주방과 내실, 드럼통 엎어 만든 둥근 탁자 한 개와 사각테이블 두 개가 전부. 꽉 채워도 스무 명 들어갈까 말까 할 만큼 옹색하고 허름하지만 이 동네서만큼은 그게 운치다. 오후 8시 강경 지인의 안내로 그 집을 찾아 장터골목에 들어섰다. 낮은 지붕의 낡고 허름한 집들로 이뤄진 좁은 골목. 침침한 가로등의 어두운 골목은 서창집 아크릴 간판의 밝은 형광등 불빛으로 겨우 생기를 유지했다.
최 씨가 낸 안주는 돼지껍질볶음과 쌉싸래한 송사리찌개, 갈치조림. 찬도 찬이지만 막걸리잔이 더 기막혔다. 겉에 ‘복(福)’를 써넣은 하얗고 묵직한 사기 사발인데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할 만큼 정겹다. 그런 서창집의 쪽 의자에 앉아 사발로 마시는 탁배기 맛은 일품이었다. 벽에는 3년 전 일본에서 출판된 책 ‘막걸리 여행’에 실린 서창집 쪽 사본이 붙어 있다.
○ 산과 강, 평야와 저수지가 한데 어우러진 논산
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꼽자면 단연 탑정호의 해질녘 서편 하늘 노을이다. 백로와 더불어 일찍 찾은 기러기 떼까지 붉게 물든 하늘로 날아올라 호반의 정취를 더욱 짙게 더한다. 석양낙조는 동편의 신풍리 호안에서 봐야 제격이다. 논산은 계백장군 500 결사대의 황산벌전투(660년) 현장으로 은진미륵 등 백제문화유적이 많다. 사찰도 여럿이지만 고려초 창건한 불명산의 쌍계사(양촌면 중산리) 풍치만 한 곳은 없다. 특히 국화 연꽃 등 여섯 가지 꽃문양으로 장식한 대웅전의 꽃살문은 보물로 지정됐다. 이 문은 겉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법당 안에서도 봐야 한다. 실내는 한지로 덮여 꽃문살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아 신기할 따름이다. 풍경소리 가운데 낙엽 구르는 소리가 듣고 싶다면 이 가을 반드시 찾아볼 일이다. ○ 여행정보
◇찾아가기 ▽강경 △철도: 서울역에서 익산행 열차를 타면 강경 역에서 내린다. △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 서논산 혹은 연무 나들목 이용. ▽논산 △철도: 용산∼목포 전 객차 정차. KTX는 목포서 1시간 55분, 용산서 1시간 19분 소요. △고속도로: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논산 나들목 이용.
◇논산관광▽홈피: tour.nonsan.go.kr ▽제14회 강경발효젓갈축제 △기간: 20∼24일 금강변 체육공원 △홈페이지: www.ggfestival.co.kr ▽축제참가 기차여행 △상품: 강경발효젓갈&대둔산 수락계곡(논산역 주관) △기간: 20일∼12월 30일 매주 토요일(오전 7시 50분 용산역 출발). 축제기간(20∼24일)엔 매일 운행 △예약: 다음카페(논산역) 혹은 www.korail.com △문의 041-732-7273 ▽백제군사박물관: 계백장군 묘, 황산벌전투 전시물 등 백제 사비시대에 득안성이 위치한 군사요충지 논산의 역사를 모은 곳으로 백제 등 삼국시대의 군사유물 전시. 공원처럼 조경이 잘 단장돼 산책하기에 좋다. 월요일 쉼. △주소: 부적면 신풍리7 △전화: 041-730-4538
◇맛집▽논산 △옛날집(주인 정윤희):추어탕, 간장게장이 주 메뉴. 깔끔 정갈한 충청도 밥상이 특징. 취암동 1041-3, 041-734-0333 △할매해장국: 논산 술꾼의 참새방앗간. 옛 ‘농방골목’에서 이정순 씨가 36년째 언니 시누이 며느리와 함께 24시간 구수한 시래깃국 백반(3000원)을 낸다. 화지3동 78. 041-732-2479 △신풍매운탕(여주인 유덕순): 낙조 풍치가 멋진 탑정호반의 33년 역사 원조식당. 참게매운탕 민물새우탕이 좋다. 셋째 화요일 쉼. 부적면 신풍리 154-3, 041-732-7754 △추시(감와인): 곶감마을 양촌의 홍시를 특허기술로 주조한 감와인. 시음 후 구매도 가능한 멋진 시음장(홍보관)도 운영. 양촌면 거사리 310-1, 041-734-8910 www.choosi.co.kr ▽강경 △덕이네 식당(여주인 김영숙): 복어찜 복어탕을 맛깔스레 낸다. 읍내 황산리 평화로 젓갈거리 보성아파트 앞. 041-745-3020 △통일식당: 꽃게장백반 졸복어탕과 말린 복어로 끓여 국물이 시원한 말린 복어탕이 특별하다. 읍내 중앙리 세상만사 옆. 041-745-1113 △서창집(여주인 최삼순): 읍내 중앙리 16. 술상 밥상 다 내는 막사발 탁배기집. 찌개백반(1인 5000원)은 미리 주문. 010-2275-4614, 041-745-4614 △달봉가든: ‘황해도젓갈’ 여주인 박종순 씨가 안채에서 직영하는 젓갈백반식당. 최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가 자전거 타고 찾아오기도 할 만큼 소문났다. 041-745-5565
◇강경젓갈▽강경 갱갱이젓갈: 강경 토박이 송승호 씨가 부인 김영옥 씨와 함께 운영. 갱갱이는 ‘강경’의 이곳 사투리 애칭. 송씨는 “젓갈 맛이 대물림되지 않으면 전통음식 설 자리가 없어져 결국은 사라지고 만다”면서 “젓갈축제에 어린 자녀를 꼭 데리고 와서 아이들이 젓갈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읍내 황산리 평화로69 보성아파트 앞(덕이네식당 옆) 041-745-4044 글·사진 논산=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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