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맛의 고장, 멋의 고장… 전주의 속살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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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9일 03시 00분


전북 전주엔 600살 된 은행나무가 있다. 더 나이가 많은 한지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엄숙하지가 않다. 오래된 나무는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지는 어린이방 띠벽지도 기꺼이 자처한다. 가만히 걸어보면 이 마을, 참 여유가 있다. 그래서 가보는 게 좋겠다. 이 가을, 전주에….
전북 전주엔 600살 된 은행나무가 있다. 더 나이가 많은 한지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엄숙하지가 않다. 오래된 나무는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지는 어린이방 띠벽지도 기꺼이 자처한다. 가만히 걸어보면 이 마을, 참 여유가 있다. 그래서 가보는 게 좋겠다. 이 가을, 전주에….
To. 전주 한옥마을의 600살 은행나무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첫인상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당신이 600년 전부터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전북 전주시 풍남동 한옥마을이요. 뭐랄까. ‘서울 인사동의 아류’랄까. 예상보다 방대하고 북적대는 풍경에 적잖이 놀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담벼락 따라 골목골목으로 들어설 때마다 또다시 놀랐습니다. 반전(反轉)입니다. ‘코리안 럭셔리’인 전주의 한지(韓紙), 작은 공방들, 뜨끈한 콩나물국밥,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이 부럽지 않은 예쁜 카페와 갤러리들…. 전통과 트렌드가 어우러진 전주 한옥마을의 매력은 뒷골목, 작은 골목일수록 빛났습니다. 운 좋다면 이곳에서 촬영하는 KBS 2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풋풋한 청춘 유생들을 만날 수도 있답니다. 저는 주인공 믹키유천은 못 만나고, 그를 보러 온 여고생들만 잔뜩 만났습니다만.

전주 한옥마을에 가게 됐을 때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렸습니다. 가 볼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자 여럿이 의견을 주셨습니다. 한 여성분은 “전동성당에 꼭 가보세요. 단풍이 한창이면 고풍스러운 성당의 가을 멋이 물씬 풍길 거예요”라 하셨죠. 감사한 제언들을 받아들고 총총 걸었습니다.

전주 공예품 전시관에서는 쪽빛과 앵두빛 한복 옷감으로 만든 커다란 리본 핀을 샀습니다. 장인의 손길을 거친 수십만 원짜리 부채는 언감생심이라 대신 부채 사진이 담긴 엽서를 품었습니다. 한지로 만든 축의금과 조의금 봉투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고운 한지 봉투에 정성을 담으면 기쁨은 두 배, 슬픔은 절반이 될 것 같아서요.

노란 은행잎이 어깨 위로 떨어질 때엔 살구빛 꽃무늬 치마를 입기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는 뿌듯함. ‘모던 마담, 전주 한옥마을에 가다’란 상상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착각은 자유라기에.

한옥마을 옆 남부시장은 서울로 치자면 남대문시장 격입니다. 뭉근한 불에 꽃전을 지지기 좋은 무쇠 프라이팬, 손에 쥐기 편해 한류 드라마 ‘대장금’에도 나왔던 전북 남원 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화려한 버선, 2000원짜리 쌍화탕과 4000원짜리 콩나물국밥….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누리는 전주의 가을 낭만은 풍성했습니다.

600살 은행나무, 당신은 제가 하룻밤을 보낸 한옥 숙박체험시설 ‘풍남헌’ 인근에 있습니다.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심어졌다는 당신(16m)의 밑동엔 5년 전부터 어린 은행나무(6m)가 자라고 있죠. 지난해 국립산림과학원이 DNA 분석으로 판정한 당신의 친자식입니다. 늙은 나무가 홀로 늦둥이를 낳았다고 한동안 떠들썩했던 이른바 ‘한옥마을 스캔들’입니다.

멋스러운 고택과 발랄한 카페의 동거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반과 선비의 마을, 전주에서 600년을 살아온 당신도 그런가요. 마을의 거센 상업화 물결을 염려하고 있지는 않나요. 또 늦게 본 귀한 자식에게는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궁금한 게 많아지는 걸 보니 당신을 향한 사랑이 시작되나 봅니다. 아웅. 남자의 계절에 여자가 주책없게시리.

From. 꽃무늬 치마를 입은 가을 나그네

글·사진 전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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