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지리산 둘레길 걷기… 산청 수철∼갈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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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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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닮은 넉넉함에 산 닮은 우직함에… 산청 둘레길만 같아라

지리산 산청둘레길은 나그네 길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길이다. 경호강 따라 덕천강 따라 걷는다. 군데군데 손바닥만 한 다랑논 벼들이 샛노랗다. 먼 산 등성이가 아슴아슴하다. 바람이 고슬고슬하다. 하늘은 쪽빛이다. 강물은 담담하고 그윽하게 흐른다. 숲길엔 마른 생풀 냄새가 싱그럽다. 밤나무 밑엔 밤송이가 수북하다. 반들반들 알밤들이 조약돌처럼 흩어져 빛난다. 다람쥐가 부산하게 오간다. 산새들은 쉴새없이 나무 위아래를 넘나든다. 가을 산하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산청 경호강 풍현 들머리를 지나는 걷기여행자들. 산청=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지리산 산청둘레길은 나그네 길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길이다. 경호강 따라 덕천강 따라 걷는다. 군데군데 손바닥만 한 다랑논 벼들이 샛노랗다. 먼 산 등성이가 아슴아슴하다. 바람이 고슬고슬하다. 하늘은 쪽빛이다. 강물은 담담하고 그윽하게 흐른다. 숲길엔 마른 생풀 냄새가 싱그럽다. 밤나무 밑엔 밤송이가 수북하다. 반들반들 알밤들이 조약돌처럼 흩어져 빛난다. 다람쥐가 부산하게 오간다. 산새들은 쉴새없이 나무 위아래를 넘나든다. 가을 산하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산청 경호강 풍현 들머리를 지나는 걷기여행자들. 산청=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 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

잠시라도 산정의 바벨탑 같은 욕망을 내려놓고 백두대간 종주니 지리산 종주의 헉헉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 어머니 시집 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 장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 애빨치 여빨치 찔레꽃 피는 돌무덤을 지나 밤이면 마실 처녀총각들 물레방앗간 드나들고 당산 팽나무 달 그늘에 목을 맨 사촌누이가 하루 종일 먼 산을 바라보던 옛길 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이원규 ‘지리산둘레길’에서>
산청(山청)은 ‘산 그리메’ 고을이다. 산 그림자 동네다.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1915m) 아래에 산청이 있다. 천왕봉은 주소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이다. 꼭대기 ‘智異山 天王峰(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돌 뒤쪽 6m 지점까지가 산청 땅이다. 그 다음부터는 함양이다. 한마디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를 수 있는 곳이 산청이다. 진주에서도 한달음이다. 산이 맑다. 공기도 달다. 강물은 눈이 시리다.

지리산둘레길 산청 수철∼갈티재 구간(47.1km)이 11월 중에 열린다. 이미 개통된 함양 동강∼산청 수철마을(11.9km)에서부터 이어진다. 아직 길표시 안내판이나 화장실 주차장 숙박시설 등이 미흡하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둘러보는 데 큰 불편이 없다. 11월 중순께면 단풍 숲길이 활활 불타오른다.

산청 덕산의 감밭. 감나무마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하다. ‘붉은 감꽃’이 온 동네와 골짜기를 덮었다. 산청=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산청 덕산의 감밭. 감나무마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하다. ‘붉은 감꽃’이 온 동네와 골짜기를 덮었다. 산청=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수철마을은 산청읍내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택시요금도 1만 원 이하. 수철마을은 옛날 무쇠 솥, 무쇠 농기구를 만드는 철점이 있어서 ‘수철동, 무쇠점’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매점도 있다. 매점 할머니는 “사람덜이 많이 오니께 참 좋아예! 찐밤, 찐고메(고구마), 찐옥쑤시(옥수수) 좀 사다가 가믄서 먹으라예”라며 활짝 웃는다.

수철마을에서 대장마을까지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마실길이다. 동네는 고즈넉하다. 담장엔 호박고지가 몸을 비비 뒤틀며 마르고 있다. 고샅길 시멘트바닥엔 벼가 고슬고슬 살갗을 태우고 있다. 아담한 들판이 노랗게 익었다. 해내들, 구매들, 너른들, 번답들, 마정지들…. 들 이름이 정겹다. 농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다. 부부가 탈곡기로 벼를 턴다.

대장마을에서 성심원까지 7.9km는 경호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지루하다. 그늘이 없다. 중간에 내리마을(안뜰)이 있다. 그 뒷산이 웅석봉(1099m)이다. 웅석봉은 ‘곰이 떨어진 산’이라 하여 곰석산이라고도 불린다. 대동여지도에 ‘유산(楡山)’으로 표시돼 있다.

길은 성심원을 지나 아침재부터 가팔라진다. 아침재는 임도 시멘트고갯길이다. 무릎에 묵직한 충격이 온다. 하얀 구절초와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지천이다. 아침재∼어천마을∼운리는 호젓한 숲길이다. 운리(雲里)는 탑동, 본동, 원정마을 3개 동네를 통틀어 말한다. 백운계곡은 조식의 산책코스다. 그는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머리를 식히려면 이곳을 찾아 노닐었다. 그의 글씨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조식은 이 계곡에서 시도 지었다.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

‘감 따 드립니다. 높이 12m’ 감을 대신 따주는 이동 고가사다리차.
‘감 따 드립니다. 높이 12m’ 감을 대신 따주는 이동 고가사다리차.
마근담(摩根潭)계곡은 ‘마의 뿌리처럼 곧은 골짜기’이다. 물이 맑다. 나뭇잎이 살짝 붉어졌다. 사리(絲里)는 실골이다. 풍수지리에 ‘늙은 누에가 실을 토하는 형상(老蠶吐絲)’이라서 실골이다. 실골은 감나무 마을이다. 감 터널길이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가득하다.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가지가 찢어질 듯하다. ‘감 따 드립니다. 높이 12m’ 광고판을 붙인 고가사다리차가 눈길을 끈다.

덕산감은 고종시(高宗시)이다. 고종 황제에게 진상을 했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있다. 고욤나무와 접목했기 때문에 고종시라고 한다는 설이다. 고종시는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으며 맛이 달다.

감은 제사상에서 ‘조율이시(棗栗梨시)’로 맨 나중에 놓인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서 왕을 상징하고, 밤은 한 송이에 세 톨까지 나오니 삼정승을 뜻한다던가. 배는 씨가 6개인데 이것은 6판서를, 감은 씨앗이 8개라 팔도관찰사란다. 그렇다면 씨가 없는 고종시는 뭘 뜻할까. 마침 고종은 왕보다 높은 황제였다.

길을 열어 준 마을 주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마음 표시.
길을 열어 준 마을 주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마음 표시.
산청은 가락국 땅이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의 무덤인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왕산에 있다. ‘전(傳)구형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구형왕릉으로 ‘전(傳)’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구형왕(재위 521∼532년)은 가락국 10대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그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이곳 왕산에 수정궁을 짓고 살다가 5년 만에 죽었다. 그는 죽을 때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구형왕릉은 비탈땅에 만든 미니 피라미드식의 특이한 돌무덤이다. 산청사람들은 그 돌무덤엔 이끼가 끼지 않고 칡넝쿨도 덩굴손을 뻗지 않는다고 말한다. 새도 앉지 않고 낙엽도 그곳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산청 사람들은 우직하다. 소박하다. 구형왕 돌무덤의 돌들처럼 울퉁불퉁하지만 변치 않는다. 성철 스님(1912∼1993)은 산청 단성면 묵곡 출신이다. 그는 스물다섯에 지리산 대원사로 출가했다. 그의 생가 터엔 겁외사(劫外寺)가 있다. ‘시간 밖의 절’이다. 산청도 시간 밖에 있다. 단속사(斷俗寺)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땅’이다. 산천재처럼 ‘하늘이 산 가운데 있는 곳’이다. 마침 산천재 입구 화살나무 잎이 붉디붉게 물들었다.
▼평생 벼슬 한 번 안한 채…
상감-왕후에 직언하던 조식, 60세에 지리산서 제자 키워▼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은 조선 선비의 으뜸이다. 그는 스스로 산림처사를 자처하고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는 ‘선비는 천자(天子)조차도 마음대로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인생의 꽃이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민족의 마지막 보루’라고 굳게 믿었다. 선비가 글공부를 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실행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면에서 동갑내기 이황(1501∼1570)과 생각이 달랐다. 이황은 어디까지나 학문을 이론으로서만 추구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범생이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조식은 이황에게 충고의 편지를 썼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조식은 성리학만 고집하지 않았다. 도교 불교 양명학 등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평생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일정하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만큼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선비는 글공부뿐만 아니라 활 쏘고 말 달리는 것도 해야 하며 음양 천문지리 의약도 두루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사람이 60여명이나 됐다.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 3대 의병장이 모두 그의 제자였음은 물론이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북인과 남인으로 각각 갈라져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고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 그 맥을 이어갔다.

조식은 임금에게도 거침없이 할말을 다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종(재위 1545∼1567년)에게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자전(慈殿·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중종)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문정왕후는 한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고, 임금인 명종은 어린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식이 마흔 셋일 때 중종(재위 1506∼1544년)이 죽었다. 조식은 시 한 수를 지어 감회를 드러냈다. ‘한겨울에 베옷입고 바위굴 속에서 눈비 맞으며/구름에 가려진 햇살도 쬐어본 적 없건마는/서산으로 해가 진다고 하니 몹시 슬프구나!’ 중종의 신하도 아니었고, 중종으로부터 손톱만큼의 은혜조차 받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백성 된 도리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조식은 18세 때 절에서 책을 읽다가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기묘사화). 숙부 조언경도 그에 얽혀 죽임을 당했다. 1545년 마흔 네 살 땐 절친한 벗들인 이림 곽순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죽었다. 과거시험에 뜻을 접은 이유다.

조식은 지리산을 닮았다. 그는 평생 지리산에 17번이나 올랐다. 그는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했다. ‘천석의 무게를 가진 큰 종을 보게나/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처럼/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시를 짓기도 했다.

그는 나이 60에 지리산 아래 덕산에 들어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산천은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주역의 대축괘(大畜卦)를 의미한다. 강건하고 독실하게 마음을 닦아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조식은 1572년 덕산 산천재에서 일흔 하나에 눈을 감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의 이름 앞에 그 어떤 벼슬도 쓰지 마라. 오직 ‘처사(處士)’로 쓰는 게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작은 꽃망울 지닌 고고한 꽃매화… 선비를 닮은 ‘산청 3매’ 오롯이▼

562년 조식이 산천재 앞뜰에 직접 심은 매화 남명매.
562년 조식이 산천재 앞뜰에 직접 심은 매화 남명매.
봄이 되면 섬진강변에 매화가 우르르 핀다. 화사하다. 하지만 이 매화는 대부분 매실을 따기 위하여 양계장 닭처럼 ‘대량양식’하는 꽃이다. 일본 개량 매화다. 꽃이 덕지덕지 붙는다. ‘매화나무’라기 보다는 ‘매실나무’인 셈이다. 고고한 기품이 덜하다. 향기도 오래가지 않는다. 벚꽃처럼 우르르 피었다가 우수수 진다.

토종매화는 꽃이 작다. 꽃도 띄엄띄엄 성글게 돋는다. 향이 은은하고 오래간다. 검버섯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어느 날 화르르 꽃을 토해낸다. 경남 산청엔 늙은 선비를 닮은 토종매화가 많다. ‘산청 3매’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정당매가 있다. 정당매는 고려시대 문인 강회백(1357∼1402)이 젊은 날 단속사에서 심었다는 매화다. 강회백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던 선비. 정당매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탑동 단속사 터에 있다.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 현재 3개 줄기가 외과수술을 받고 남아있지만 거의 고사 상태다. 봄마다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손자줄기에서 꽃망울을 토해내고 있다.

원정(元正) 하즙(1303∼1380)이 심었다는 원정매도 있다. 원정매는 정당매가 있는 탑동 윗동네 원정마을에 있다. 원줄기는 말라 죽었으나 밑둥치 옆에서 가지가 나와 분홍꽃을 토해낸다.

남명매는 1562년 남명 조식이 61세 때 산천재 앞뜰에 심은 홍매다. 남명매는 아직도 헌걸차고 꼿꼿하다. 봄마다 사진작가들의 단골 모델이다. 향기도 은은하고 그윽하다. 지리산 백운동 골바람 따라 10리 밖까지 퍼진다. 덕천강 강물 따라 멀리멀리 흐른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산청 수철마을∼갈티재 구간별 거리

△수철마을∼<1.3km>∼지막마을∼<2.9km>∼대장마을∼<2.4km>∼산청고교∼<0.5km>∼내리교∼<1.2km>∼내리한밭∼<1.5km>∼바람재∼<2.3km>∼풍현(성심원)∼<2.0km>∼어천마을∼<2.7km>∼헬기장∼<6.0km>∼점촌마을∼<1.2km>∼탑동마을∼<1.4km>∼원정마을∼<5.7km>∼백운계곡∼<3.0km>∼마근담계곡∼<3.9km>∼사리(고마정)∼<1.8km>∼사리(천평표)∼<3.2km>∼중태마을∼<1.9km>∼유점마을∼<2.2km>∼갈티재

▽교통

△승용차: 서울→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산청나들목

△고속버스: 서울→진주(진주에서 산청행 버스)

△시외버스: 서울남부터미널(3시간 소요)

산청에서 수철마을까지 버스로 10분 소요. 산청군내버스(055-973-5191), 산청버스터미널(055-972-1616).

▽먹을거리

△송림산장식당(055-973-6742): 십전대보오리백숙 △약초와 버섯골(055-973-4479): 약초유기한우 샤부샤부, 약초버섯매운탕 △강변식당(055-973-2346): 메기찜 자라탕 전문 △수풀 林(055-972-4066): 해물콩나물밥 보쌈, 낙지전복탕

▽곶감=산청곶감작목회(055-973-0085)

▽숙박=수철마을 강수성 이장(010-8611-1322)

▽문의=산청군 산림녹지과(055-970-6900), 문화관광과(055-970-6421~3), (사)숲길(055-884-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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