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의 51세 어진(御眞)은 수염의 묘법이 탁월하다. 수염을 그리기에 앞서 피부색을 칠한 뒤 그 위에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그렸다. 이모본(移模本·원본을 옮겨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원본에 충실하게 제작된 것으로 현존 어진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는 “영조의 어진에는 사실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던 우리 어진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화정박물관이 개최하는 ‘한국·중국·일본의 군주초상화’는 한국의 어진과 중국, 일본 군주 초상화의 특색과 사례를 설명하는 강연이다. 한국 초상화 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조 교수가 진행하며 1일 ‘한국의 어진’ 강의가 열렸다. 8일 중국 군주, 15일에는 일본의 군주 초상화를 주제로 강연을 연다.
조선시대 영조의 어진을 통해 보듯 한국 어진은 ‘일호불사편시타인(一毫不似便是他人·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이라는 화론을 엄격하게 적용한 점이 특징이다. 태조 어진의 경우 익선관을 어두운 잿빛으로 칠한 뒤, 앞에서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칠하면서도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과의 경계를 밝게 처리해 도드라져 보이도록 하는 등 정교한 배색 처리가 돋보인다. 조 교수는 “우리 어진의 경우 대개 의례용으로 제작된 만큼 위엄 있고 근엄하게 그렸다”고 설명한다.
중국 군주의 초상화는 의례용뿐 아니라 황제의 일상생활 정경을 표현하거나 행사나 의식을 치르는 것을 기록하고자 그린 초상화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명 말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는 ‘행락도(行樂圖)’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관조하거나 자녀, 신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군주의 모습이 그려진다. 명 세종이 어좌선을 타고 궁궐에 가는 ‘명 세종 입필도(入필圖)’에서는 화면에 풍속적 요소가 가미되어 분위기를 돋우며, 말을 타고 사열하는 ‘건륭제 대열도(大悅圖)’나 사냥하고 있는 ‘청 고종 춘수도(春搜圖)’ 등의 초상화는 황제의 생활 장면들을 담아 친밀감을 준다.
일본의 군주 초상화는 사실적인 묘사를 피하면서 개성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정적으로 유형화했다. 아랫볼이 불룩한 둥근 얼굴에 두꺼운 눈썹, 가늘게 일선으로 그어진 눈, 조그맣게 붉은 점을 찍은 입이 특징이다. 이 같은 무표정하고 특징 없는 얼굴은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됐다고 조 교수는 설명했다. 가마쿠라막부 시대에 등장한 하나조노(花園) 군주의 초상화는 이런 무특징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조 교수는 “한국의 경우 어진을 임금 그 자체로 보는 상징적 의미가 커서 사회적 기능과 의미가 삼국 중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되지만, 의례용에만 적합한 초상 형식이 발달해 초상화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성이 많지는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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